우리는 '영화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고, '드라마 작가'의 이름을 기억한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면,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생각 해보라. 영화에서 '시나리오를 누가 썼지?'는 그리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작가의 이름'이 훨씬 더 중요한 이슈가 된다. 우리는 이름값 있는 유명한 드라마 작가들의 이름을 그리 어렵지 않게 나열할 수 있다. 친애하는 노희경이라든지, 김은희, 김은숙, 송재정, 혹은 김수현이라든지, 어쩌면 임성한까지..

 노희경 대본집 <거짓말>
노희경 대본집 <거짓말>북로그컴퍼니

그만큼 드라마에서 작가의 영향력은 지배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완성된 시나리오'를 두고 충분한 연구 끝에 작업에 돌입하는 영화와는 달리 드라마는 훨씬 더 즉흥적으로 진행된다. 대부분(사전제작을 제외하면) 다 쓰이지도 않은 대본을 가지고 촬영이 시작된다. 그러다보니 막판에는 '쪽대본'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위험한 일이 아닌가?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시놉시스가 존재하고, 제작진 간에 어느 정도 '교감'이 있겠지만, 결국 작가가 'A는 웃다가 죽는다'라고 쓰면 당장 방송을 내보내야 하는 PD는 그리 찍을 수밖에 없다.

권력을 둘러싼 정·재계의 암투 다룬 <더케이2>, 시작은 좋았다

그러므로 드라마를 시청할 때는 무엇보다 '작가'가 누구인지를 세심히 살펴야 한다. tvN <THE K2>의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서론이 길어졌다. <THE K2>는 제법 잘 나가는 드라마다. 화려한 액션과 권력을 둘러싼 정계와 재계의 암투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내면서, 시청률은 5.646%로 10회 연속 동시간대(케이블과 종편 기준)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지창욱을 앞세워 젊은 세대를 설득하고, 송윤아를 통해 중장년층을 매혹시키면서 전연령층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송윤아와 조세하
송윤아와 조세하 tvN

무엇보다 김제하(지창욱), 최유진(송윤아), 장세준(조성하) 사이에 만들어진 갈등과 긴장감은 시청자들을 몰입시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유력한 대선 주자인 남편 장세준을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하는 최유진과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증오하는 최유진과 손을 잡은 장세준의 관계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마냥 짜릿했고, 장세준의 라이벌인 박관수를 제거하는 '목적' 하에 같은 배를 타기로 한 최유진과 김제하의 관계도 흥미진진했다. 특히 위기에서 최유진을 구하고, 흠뻑 젖은 그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장면(5회)은 얼마나 '저릿'했던가.

그런데 1회부터 거침없이 몰아붙인 '쫄깃쫄깃'한 진행과는 달리 드라마의 핵심 키로 숨겨져 있던 '고안나(임윤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부터 시청자들의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사실 이미 우려됐던 부분이다. 우선, 임윤아의 연기력에 대한 불안감이 내재돼 있었고, 더군다나 아이돌 출신 연기자에 대한 시청자들의 시선이 더욱 냉정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안나의 초반 역할을 제한적으로 설정했던 부분은 드라마의 흡인력에 상당한 도움이 됐다. 의도치 않은 '신의 한 수'라고 할까?

임윤아 등장 이후 <용팔이>가 돼버린 드라마

 임윤아의 등장 이후 드라마가 산으로 가기 시작했다.
임윤아의 등장 이후 드라마가 산으로 가기 시작했다. tvN

최유진과 장세준의 아킬레스건이자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열쇠인 '고안나'의 '각성'은 드라마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순진무구하고 철없는 소녀에서 엄마의 복수를 위해 거대한 싸움에 뛰어드는 성숙한 여성으로 변하는 과정에 김제하와의 '사랑'은 기폭제로 작용(꼭 사랑을 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김제하를 치유하는 역할까지 해야 하니 말이다. 즉, 세 명의 등장인물과 모두 얽혀있기 때문에 고안나의 캐릭터와 연기력은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다.

CCTV를 통해 고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던 김제하가 이른바 '임윤아(고안나를 지워버렸다)의 라면 CF'를 바라보며 '사랑'에 빠져드는 장면(5회)까지는 '설렘'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문제는 '고안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그 이후부터였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임윤아의 연기력은 엄마를 잃고 아빠에게도 배신 당한 고안나의 상처를 표현하기에 현저히 부족해 보인다. 드라마의 전면으로 부상한 '멜로'도 드라마의 긴장감과 흐름을 갉아먹고 있다.

 <용팔이>의 한 장면
<용팔이>의 한 장면SBS

결국 '고안나의 복수극'으로 귀결될 것으로 보이는 <THE K2>를 보고 있자니, SBS <용팔이>가 떠올랐다. 장혁린 작가의 전작인 <용팔이>가 초반에 시청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힘은 온전히 '김태현(주원)'이라는 캐릭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속물 의사라고 지칭하면서도, 실제로는 돈이 없어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환자를 살려내기 위해 동분서부하는 그의 노력에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물론 주원의 연기가 뒷받침 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지창욱이 그러한 것처럼)

하지만 식물인간이 돼 잠들어 있던 한여진(김태희)가 깨어나면서 드라마의 방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가히 용두사미라 할 만한 전개가 이어졌다. 여주인공이 자신을 가둔 이복오빠 한도준(조현재)를 향한 '핏빛 복수'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하려 한다는 점에서 <용팔이>와 <THE K2>는 매우 닮아있고, 여주인공이 '복수'의 정당성을 획득할 만큼의 연기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도 닮은꼴이다. 정치와 액션이 맞물리고, 사회성이 짙은 드라마라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을 지닌 두 드라마는 같은 출발에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tvN

그리하여 '기단'을 잘 쌓았던 드라마의 '상륜부'는 어처구니 없는 조형물들로 짜여지고 있다. 이와 같은 '용두사미'는 장혁린 작가의 한계일까, 단순히 여주인공 캐스팅의 문제일까. '고안나'의 비중을 줄이고 정치권의 비릿한 이면을 좀더 밀도 있게 파헤쳤으면 어땠을까. 혹은 지창욱과 송윤아의 '묘한' 케미에 좀더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드라마는 산으로 가고, 예고됐지만 설마설마 했던 산행(山行)에 시청자들은 괴로워하고 있다. 이 흐름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 보이기에 아쉬움은 더욱 크기만 하다.

THE 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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