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 놈: 인류의 시작> B급도 아닌 C급을 표방한 블록'놈'스터 영화.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보여줬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B급도 아닌 C급을 표방한 블록'놈'스터 영화.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보여줬다.(주)엣나인필름

백승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숫호구>(2014)는 엇갈린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도전 정신을 높이 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후지필름 이터나상'을 주며 격려했다. 반면에 포털 사이트에 달린 관객평을 보면 "자신만의 색깔이 있다", "용기가 넘친다" 등 규칙을 벗어난 자유로움을 호평하는 사람들과 "대충 찍었다", "장난하나" 등 조악한 완성도를 질타하는 부류까지 평가가 다양하다. 분명한 것은 <숫호구>가 많은 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백승기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이하 <시발, 놈>)은 제목부터 당황스럽다. '시발'이라니. 어디서 제목을 꺼낼 생각이면 주위부터 살펴야 할 판국이라니. 참으로 놀라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시발, 놈>은 "우리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원래 무엇이었을까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왔으며 왜 존재하는 것일까요?"란 거창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유인원들 사이에서 나타난 최초의 인간 시발놈(손이용 분)이다. <시발, 놈>은 일이 처음 시작하는 '시발(始發)'과 사람의 옛말인 '놈'을 더한 세상에 나타난 최초의 인간을 의미한다. 욕을 노린 언어유희도 있을 것이다. 백승기 감독이 추구하는 C급 무비를 연결하면 'C급+발(發)'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영화는 시발놈이 식사, 옷, 잠자리 등의 첫 경험, 다른 시발놈(김보리 분)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 유인원 무리에서 인간으로 겪는 성공과 실패를 다룬다. 시발놈이 여러 문제를 해결하면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영화는 보여준다.

<불을 찾아서>(1981)를 연상케 하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계기에 대해 백승기 감독은 이렇게 설명한다. "최초의 인류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각종 자료를 찾기 시작했지만, 결론은 극과 극이었다, 모두 같은 이야기를 다른 표현 방식으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섞어 전혀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시발, 놈>은 백승기가 자유롭게 그린 인류의 시작이다.

 인류의 기원에 대해 그린 이 영화는,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인류의 기원에 대해 그린 이 영화는,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주)엣나인필름

<시발, 놈>은 영화 전체에 웃음을 주는 요소가 가득하다. 손이용 배우는 시작하고 15분 동안 전라 연기로 웃음을 자아낸다. 그가 카메라를 의식하고 성기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배를 잡게 한다.

열악한 제작 환경으로 털옷 한 벌을 걸치고 대충 분장을 한 다음에 유인원이라고 우기며 뛰어다니는 장면은 너무 뻔뻔해서 박수가 터진다. 시발놈과 유인원이 브레이크 댄스 등을 추는 군무 장면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장면도 재미있다.

영화에서 웃긴 요소 중 하나는 백승기 감독이 직접 맡은 영어 해설이다. 진지한 자막과 달리 내레이션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영어로 꾸며졌다. 예를 들면 "시발놈은 직접 힘을 쓰지 않고 더 많은 식량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터득했다"는 자막을 <스타크래프트> 게임에서 사용하는 "쇼 미 더 머니, 앤 베리 매니 치트 키"라고 말하는 식이다. "승리의 신이 함께하는 것 같았다, 시발놈은 다시 힘을 내보기로 했다"는 자막을 "마이클 조던, 저스트 두 잇"이라고 능청스럽게 표현할 때엔 포복절도하게 된다.

 <시발, 놈>은 분명 재미있는 영화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웃기기만 한 영화도 아니다.
<시발, 놈>은 분명 재미있는 영화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웃기기만 한 영화도 아니다.(주)엣나인필름

<시발, 놈>이 흥미로운 점은 마냥 웃기기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발놈과 유인원 무리가 사는 영화 속 세계는 지금 현실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인원 무리에 갑자기 던져진 시발놈은 세상에 태어난, 또는 사회에 던져진 우리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모든 것이 낯선 시발놈처럼 누구에게나 인생도 처음 겪는 일이다.

백승기 감독은 사회를 풍자하는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놓았다. 우주에서 갑신과 을신이 싸운다는 설정이나 시발놈이 유인원 무리를 지배하는 장면은 우리 사회의 지배 구조를 함축적으로 담았다. 맹수가 나타났을 때 유인원 무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혼자 도망간 시발놈의 행동엔 세월호가 겹쳐진다.

<시발, 놈>은 시발놈끼리, 시발놈과 유인원 무리가 다투는 모습에서 "그는 또 다른 너"라고 말하며 공존을 강조하고 폭력이 아닌 대화라는 수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렇게 영화는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시발(始發)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C급을 표방한 <시발, 놈>은 그저 B급 보다 아래라는 의미의 C급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개념의 이 작품. 백승기 감독이 아니었으면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C급을 표방한 <시발, 놈>은 그저 B급 보다 아래라는 의미의 C급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개념의 이 작품. 백승기 감독이 아니었으면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주)엣나인필름

<숫호구>와 <시발, 놈>은 C급 무비를 표방한다. C급 무비는 마니아와 하위를 뜻하는 B급 무비의 아래 등급이 아니다. 백승기 감독은 C급 무비를 "영화 제작에 필요한 매커니즘인 캠코더(camcorder)로 촬영해서 컴퓨터(computer)로 편집하고 사이버(cyber)를 통해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하는 코믹(comic)하고 크리에이티브(creative)한 시네마(cinema)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알파벳 C와 모든 과정이 비교적 빠르게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의 급할 급(急)을 합성한 단어"라고 부연한다. C급 무비는 품질의 하향평준화가 아닌, '주변의 것을 활용하여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만들고 즐길 수 있는 영화'로서의 범위의 확장을 지향한 개념이다.

<시발, 놈>은 가볍게 보이지만 절대 가볍지만은 않다. B급 정서로 무장한 웃음과 시대를 날카롭게 풍자하는 시각을 겸비했다. 자막과 내레이션, 소제목, 무성 영화의 요소 등 형식의 고민도 엿보인다. 부족한 제작비에서 감행한 네팔 로케이션의 장면도 인상적이다. 극 중에서 시발놈이 흘리는 눈물은 보는 이에게 진심으로 다가온다. 마치 <숫호구>의 마지막 장면이 그랬듯이 말이다.

<시발, 놈>엔 한국 영화에서 점차 찾기 힘든 패기가 숨 쉰다. C급 정신으로 무장하여 가능성과 다양성을 모색하는 백승기처럼 주류에 저항하며 관습을 무너뜨리는 '돌아이'가 우리 사회엔 더 많이 필요하다. 창의성은 바로 이런 '돌아이'들이 만드는 법. 관심이란 거름이 이들에게 절실하다.

시발놈 인류의 시작 백승기 손이용 김보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