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에서 찍은, 덕혜옹주와 종무지의 결혼을 기념하는 비석. 대마도 입장에서는 이 결혼이 기념할 만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김종성
고향 잃고 부모 잃은 덕혜에게 일본은 새로운 것을 요구했다. 전전(前前) 대마도주의 손자이자 전 대마도주의 조카인 종무지(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을 강요한 것이다. 양귀인이 떠난 지 2년 뒤인 1931년의 일이다. 이 결혼과 함께 이덕혜는 종덕혜로 바뀌었다. 부인이 남편의 성을 따르도록 한 일본 법률 때문이었다.
조선과 일본은 대마도 지배자를 각각 대마도주 및 대마번주로 격하해서 불렀다. 조선은 그를 대마도주로 책봉하고, 일본은 대마번주로 책봉했다. 하지만, 대마도는 오랫동안 정치적 자율성을 누렸다. 대마도 지배자는 대마도 안에서 왕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조선과 일본 양측을 상대로 신하 노릇을 해온 대마도는 1869년에 일본에 편입되기로 했다. 조선이 갈수록 약해지는 상황에서 1868년에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새롭게 업그레이드되자 일본 쪽에만 줄을 서기로 했던 것이다. 순순히 편입되어준 데 대한 답례로 일본은 대마도 왕실을 백작 가문으로 책봉했다. 그렇게 백작 가문으로 전락한 대마도 왕실의 계승자가 바로 종무지였다.
조선의 왕녀(공주+옹주)가 과거의 신하였던 대마도 왕실에 시집가는 것은 조선 왕실의 위신을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일본이 조선과 대마도 양쪽의 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고, 덕혜는 이런 정략결혼의 희생양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이어 이 결혼도 정신적 충격이 됐는지, 결혼 얼마 뒤부터 덕혜는 정신분열증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어딘가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종무지가 지은 시에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란 대목이 나온다. 덕혜는 그렇게 병들어 갔다. 그런 중에 딸 정혜가 태어났다. 1932년, 덕혜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이 결혼생활은 처음 15년간은 그런대로 유지됐다. 하지만 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파탄 나고 말았다. 파탄의 원인은 '쩐', 전(錢)이었다. 일본 패망 전만 해도 두 사람은 귀족 신분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 돈을 받았다. 종무지는 그 돈으로 가사 도우미들을 고용해 덕혜를 보살피도록 했다. 덕분에 종무지는 병든 아내의 수발을 들 필요가 없었다. 그냥 자기 일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미군이 일본을 지배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 부부는 평민으로 전락하고 재산 대부분마저 강제 헌납을 당했다. 이렇게 되자 가사도우미를 구할 수 없게 되고 이로 인해 덕혜를 직접 보살펴야 할 상황이 되자 종무지는 종덕혜를 과감하게 내버렸다. 정신병원에 보내버린 것이다.
이때가 46년, 덕혜 나이 서른다섯 때였다. 영화 속의 종무지는 자신이 종덕혜를 버린 게 아니라 종덕혜가 자신을 떠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종무지가 종덕혜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린 것이었다. 일본 왕실에 이어 전(前) 대마도 왕실마저 덕혜를 불행으로 내몬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두 왕실' 중 하나는 바로 전 대마도 왕실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1951년, 덕혜는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 보호자도 없이 일본 정신병원에 갇힌 환자가 일본 국적마저 상실했으니, 한층 더 무방비 상태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종무지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 55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 그는 의식 없는 종덕혜를 상대로 이혼절차를 진행했다. 덕혜 본인이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영친왕이 이혼에 동의해주었다. 이혼 뒤 종무지는 새 장가를 들었다.
덕혜를 불행으로 내몬 '두 왕실'에는 전(前) 조선 왕실 즉 이왕실도 있었다. 고종을 태왕(상왕)으로 하고 순종을 이왕으로 하는 상태에서 1910년 출범한 이왕실은 1926년 순종이 죽자 이복동생 영친왕을 제2대 이왕으로 세웠다. 이왕실은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사라졌다.
조선 왕실도 덕혜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