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지망생 준철(이수완 분)은 동거중인 여자친구 현주(신유주 분)와 다투고 집에서 쫓겨난다. 난처한 준철에게 때마침 준철의 선배가 출장을 가야 한다며 자기 집에 있는 고양이를 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고양이가 아니라 실어증에 걸린 가출 소녀(히로사와 소우 분)가 있었다. 경찰서에 신고하자고 선배와 말싸움을 하다 뛰쳐나온 준철은 여자친구의 화가 풀렸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가지만 또다시 쫓겨난다. 준철은 결국 선배의 집에서 고양이 소녀라 불리는 가출 소녀와의 동거를 시작한다.

에로와 멜로 사이의 발칙한 성담론

 이수완과 히로사와 소우
이수완과 히로사와 소우시작, 골든 타이즈

남녀사이란 모름지기 서로 대등한 상태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했다면, 서로 대등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완전한 결합의 상태인 사랑에 이르는 노력과 투쟁 과정이 바로 연애다. 하지만 사랑이란 고난이 있어야 더 애절한 법. 잘나가는 스타(줄리엣 로버츠)와 찌질남(휴 그랜트)의 사랑(<노팅 힐>)이나, 재벌 상속녀(앰버 발레타)와 소심남(케빈 제임스)의 사랑(<Mr. 히치>)이 그래서 더 흥미로운지도 모르겠다. 또는 소수자나 결핍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 역시 관객의 몰입을 유발하는, 영화의 오래된 소재기도 하다. <오아이스>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같은 영화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사랑을 확인한 바 있다.

영화 <고양이 소녀> 역시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고양이 소녀는 자신과의 성관계를 몰개 찍어 유포한 전 남자친구를 칼로 살해하고 사라진, 인터넷 상의 괴담 같은 주인공이다. 그때 충격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성적 착취를 당하며 떠도는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뇌쇄적인 몸매로 인해 여자 주인공 혹은 여성 관객들에게는 연민을, 남자 주인공과 남성 관객들에게는 묘한 매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녀에게 성적인 매력과 인간적인 동정을 동시에 느낀 주인공 준철은 위험하고도 아찔한 사랑을 시작한다. 소외된 자들의 가슴 아픈 사랑이 그래서 더 자극적이고 애달프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내가 연인과 관계한 장면이 인터넷에 유포되지 않았을까?'라는 두려움은 현대인들이라면 한 번쯤 가져봤을 법하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소재로 무장한 영화 <고양이 소녀>를 저예산 다운로드 전용 에로 영화로 치부할 수 없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감독이 영화 속 곳곳에 심어둔, 예리하면서 재치 넘치는 장치는 이 영화가 3000만 원이라는 저예산으로 제작됐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완성도, 성의 정치학과 연애라는 담론을 담아냈다.

묘하게 야한 영화

 고양이 소녀와 준철, 민혁
고양이 소녀와 준철, 민혁시작, 골든 타이즈

애초 자신의 여자친구의 동영상을 유포시킨 남자친구나, 불쌍한 고양이 소녀를 집에 가둬두고(심지어 목줄까지 묶어두고) 자신의 성적욕구를 해소하는 선배남. 자신의 배우이자 친한 형의 여자친구에게 빚 대신 잠자리를 제안하고, 그의 소중한 여자를 강간하고 심지어 돈을 받고 팔아버리기까지 하는 매니저. 또한 그런 소녀를 가혹하게 채찍질하는 변태 감독 등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들은 하나같이 여성을 착취하는 가해자이자 정복자의 위치에 서 있다.

때문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섹스신들은 하나같이 자극적이고 묘한 흥분을 일으킨다. 게다가 영화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현명하게 연출한 감독과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배우들과 훌륭한 촬영 덕분에 섹스 영화의 미덕을 백분 발휘하면서도 거부감 없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드라마가 탄생했다.

 준철 역을 잘 소화한 이수완
준철 역을 잘 소화한 이수완시작, 골든 타이즈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고양이 소녀를 인간으로 바라보며 그녀와의 소통을 시도하고 사랑을 나누는 역할은 주인공 준철이다. 고양이 소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애절하고 그녀를 쓰다듬는 손길은 섬세하다. 준철이라는 삼류배우의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한 배우는 이수완이다.

이수완이라는 이름이 낯선 관객은 MBC <서프라이즈>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렇다. 바로 재연배우 이중성이 그다. 이수완으로 개명한 그는 이제 더 이상 재연배우가 아닌 정극 연기에 첫 도전을 한 신인 아닌 신인 배우이자 감독의 의중을 이해하고 역할에 완전 몰입한 메소드 배우로서 관객에게 조심스레 도전장을 내밀었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그가 이렇게 매력적인 배우였나 싶을 정도로 주인공 준철 역할을 훌륭히 소화했으며, 영화의 플롯을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역을 맡았다. 다른 상업영화의 주연배우로서의 자리도 충분히 꿰찰 정도의 믿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섹시 아이콘 고양이 소녀

 고양이 소녀역의 히로사와 소우
고양이 소녀역의 히로사와 소우시작, 골든 타이즈

이 영화에서 고양이 소녀라는 타이틀 롤을 맡은 배우 히로사와 소우는 국내 관객에게 <러브 익스포져>(소노 시온 감독)로 잘 열려진 배우다. 일본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녀는 <소프트 보이즈> <노트 : 아내와 남교수의 금지된 사랑> 등 국내 개봉작에서도 그녀의 4차원적인 매력과 성적 매력을 발산하기도 했다.

한국 영화에 첫 출연한 그녀는 저예산 영화임에도 출연을 결심하게 된 동기로 '탄탄한 시나리오'와 '출중한 배우들' 그리고 '충무로에서 활동 중인 프로페셔널한 스태프'라고 밝힌 바 있다. 전 남자친구의 배신과 살인이라는 트라우마를 안고 나쁜 남자들에게 끊임없이 학대당하며 사는 그녀는 정말 고양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동물적인 움직임과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주인공을 연기했다. 그녀의 연기로 인해 그녀가 등장하는 섹스신은 설명할 수 없는 흥분과 더불어 묘한 죄책감까지 들게 한다. 유창한 한국어 구사와 역할에 완전 몰입하는 프로 정신으로 인해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된다.

또한 이 영화의 재미를 살린 일등 공신은 배우 신유주다. <미인도> <식객> 등의 영화에 출연함은 물론, 얼마 전 개봉한 <미스 체인지>에서 처음으로 섹스 어필한 매력을 발산한 그녀는 이 영화에서도 준철의 여자 친구 현주 역을 맡아 관능적이면서도 단아한 자태를 뽐내며 관객의 시선을 빼앗는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 영화의 색깔이 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그녀는 준철과 고양이 소녀 그리고 필호와의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잡기도 하고,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하는 팜므파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영화를 보며 불편한 마음을 갖는 여성관객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여자는 지나치게 처절할 정도로 약자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는 다른 방식을 택한 최경진 감독은 이러한 내용을 섹스 드라마로 풀어내면서도 다른 시선을 투영했다.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면 고양이 소녀나 현주 캐릭터나 모두 어찌 보면 단지 피해자가 아닌 남성을 포식하는 팜므파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고양이 소녀 포스터
고양이 소녀 포스터시작, 골든 타이즈
영화의 내러티브와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꽉 짜인 느낌을 주는 연출 덕에 에로가 아닌 예술적인 섹스영화가 탄생한 것은 바로 감독이 계산한 미장센과 유려한 편집 덕분이다. 신인 감독답지 않은 노련한 연출력을 선보인 최경진 감독은 차기작이 기대되는 감독이자 작가로 영화 <고양이 소녀>에서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물론 촬영이나 음악 등의 기술적인 부분이나 로케이션이나 의상·소품 등의 영화 제작 시스템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을 드러내긴 하지만, 그런 것 또한 오히려 저예산 영화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아티스트 봉만대> <꼭두각시> 등을 제작한 골든 타이드 픽쳐스는 최근 불고 있는 IPTV나 다운로드 영화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제작·투자사로서 이번에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저예산 걸작 영화 한 편을 제작했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좋은 환경에서 제작됐다면 훨씬 멋진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럼에도 흥미있고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자신이 생각한 대로 필름 위에 담아낸 감독의 연출력은 빛을 발한다.

영화를 보면서도 내내 웃을 수 있고, 영화적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조연을 맡은 배우들 때문이다. 필호 역을 맡은 임태상은 능청스러운 역할을 맡아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로 자리 잡았고, 선배 민혁 역을 맡은 이규혁은 <유럽 블로그> <젊음의 행진> 등의 연극·뮤지컬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연기자로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변태 백 감독 역의 김재록은 <뫼비우스> <피에타> 등의 김기덕 감독 영화는 물론 독립영화 <명왕성> 등 많은 작품에서 활약했던 내공있는 연기자다. 시황 역의 백재호 역시 <성균관 스캔들>에서 출연했던 낯익은 얼굴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덩치남 역의 박재웅은 이 영화의 출연진들의 향연에 방점을 찍으며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를 안겨준다.

최근 수십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갔음에도 조악한 완성도로 인해 관객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제작비가 전부가 아님을. 또한 작은 영화도 뛰어난 완성도로 인해 예술적·오락적 성취를 충분히 이룰 수 있음을. 3000만 원의 제작비로 한 번쯤은 볼 만한 작품을 만든 <고양이 소녀> 제작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양이 소녀 이수완 히로사와 소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