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파주NFC에서 열린 포토데이 행사에서 포즈를 취한 이영표 선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반했다. 축구 싫어하는 내가 축구선수에게 반했다. "멋지더라. 내 롤모델로 삼기로 했어." 지인에게 살짝 고백하자 그가 말했다. "아직도 안정환이냐?" 천만에다.

물론 그는 멋졌다. 땡볕에 축구하느라 꽃미남 피부가 저리 됐네. 안타까움에 혀도 끌끌 찼다. 지단보다 베컴이었고, 이천수보다 안정환이었다. 몇 몇 선수들 보곤 생각했다. 다리 짧아도 축구 하네?

그런데 내가 반했다. 새로운 꽃미남의 출현도 아니었다. 외국 물 먹고 들어온 그에게서 '다니엘 헤니의 향기를 맡아서'도 아니었다. 우연이었다. 그가 한 말을 보았다.

그가 한 말이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알았다. 그만 보면 왜 즐거운지. 그에게선 왜 즐거운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지. 그의 눈이 왜 초롱초롱한지. 조그만 체구에서 어찌 그리 힘이 넘치는지.

"패스 놀이에 푹 빠졌어요."

이영표가 말했다.

"드리블보다 더 자극적인 흥밋거리를 찾았어요. 바로 패스에요. 최근 들어 패스야말로 진정 재미있는 '놀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그 맛에 푹 빠져 지내요."

깜짝 놀랐다. 자기 일을 이렇게 말하다니. 누가 자기 일의 한 부분이 정말 재밌어서 새로 발견했다고 말할까. 이건 어린아이들 몫이라 생각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 영역이라 생각했다.

"너무 재밌다." 아이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몰두한다. 재밌으니까.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억지로도 아니다. 돈 때문은 더 더욱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밌으니까. 그리고 미친다. 미치니까 미친다.

어른들은 거기에서 결과만 본다. 1등 했니? 상 탔니? 아이들은 그냥 재밌을 뿐인데. 생활에 찌든 우리들은 곧잘 말한다. 일을 재미로 하니? 연봉이 얼만데? 목구멍이 포도청이야. 우리들은 묻지 않는다. "이 일이 재밌을까?" 우리들은 찾지 않는다. 내가 재미있는 일이 뭐지?

아인트호벤과 계약 직후인 2003년 1월이었다. 이영표는 말했다.

"누가 많이 받고 적게 받고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축구는 즐기면서 한다는 게 첫 번째 목표다. 해외진출도 보다 높은 수준의 축구를 즐기기 위해서 원하는 것뿐이다."


그는 항상 말했다. "축구 그 자체가 즐겁다." 그런 그에게 나는 반했다.

나는 즐긴다, 고로 존재한다

▲ 26일 저녁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축구대표팀 평가전에서 이영표 선수가 공을 다루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월드컵이 끝났다. 16강에 오르지 못한 대한민국 월드컵이 끝났다. 축구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돌아왔다. 사람들은 응원가를 접고 일터로 돌아갔다. 그 일터는 너무나 쓸쓸하다. '밥벌이의 지겨움'이 스멀스멀 밀려든다.

어른인 우리는 말한다. "마냥 즐거울 순 없다." 어른이 되면 말한다. "어떻게 즐거운 일만 찾냐? 일은 일이고, 노는 건 노는 거야." 우리들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놀기 위해 일한다. 농담처럼 말한다. "먹기 위해 산다."

당연하다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그때부터 고역인 게. 그래서 ‘밥벌이의 지겨움’을 달래며 생각한다. 일은 일이다. 일은 밥벌이다. 즐겁지 않은 게 당연하다. 지겹지만 어쩌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왜 끔찍한가? 밥벌이는 왜 지겨운가? 나의 일은 왜 놀이가 되지 못하고 지겨운 밥벌이로 내 자신을 후벼 파나? 나는 왜 내 일을 즐기지 못하나? 나는 뭐가 재밌나? 어른이 된 우리는 묻지 않는다. 혹시 이 질문이 고개 치켜들까 얼른 TV를 켠다. 술을 마신다. 잠을 잔다.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스트레스도 높아진다. 올라가는 연봉 따라, 스트레스도 올라간다. 일은 더 고되고, 마음은 더 가팔라진다. 그리고 깨닫는다. 연봉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또 누군가는 생각한다. 행복하지 않아도 좋으니, 성공해봤으면 좋겠다.

천재도 즐기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아인트호벤과 계약이 끝나갈 때, 한 기자가 이영표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고 싶냐? 그가 말했다. "축구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그는 또 말했다. "전 다른 목표는 생각해본 적 없고요, 그냥 즐기는 축구를 계속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말했다. "훗날 노벨상을 받게 된 연구를 그렇게 빨리 해낼 수 있었던 것도 내가 그 걸 가지고 놀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또 말했다. "나는 그 전에 이미 상을 받았어요. 무언가를 발견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상은 없습니다."

글 쓰는 게 직업인 소설가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들>에서 이렇게 썼다.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잘 산다. 힘들고 어렵고 지칠수록 마음은 점점 더 행복해진다." 그래서 글을 쓴다고 했다. 때때로 너무 행복해서.

▲ 지난 2월, 앙골라전을 하루 앞두고 기자회견 중인 축구 국가대표팀 이영표 선수.
ⓒ 오마이뉴스 남소연
축구선수 이영표에게도 축구는 밥벌이가 아니었다. 아니, 밥벌이는 옵션이고, 주요리는 놀이였다. 그가 말했다.

"즐기는 것도 직업이 되면 싫다잖아요. 그런데 전 아직 재미없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다행이에요."


그게 그가 축구를 하는 이유였다. 즐거우니까. 재밌으니까. 그는 베컴을, 지단을, 호나우지뉴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행복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솔직했다.그게 지금의 그를 만든 비결이다. 성공한 비결이다. 성공했으나 허망하지 않은 이유다. 그가 어린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앞으로 누가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즐기는 그보다 누가 더 좋을 수 있을까? 누가 그만치 재밌게 살까? 난 그에게 반했다. 그가 찬 공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들어와서 말했다. 나도 그처럼 살고싶다.
2006-07-01 09:3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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