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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노년 이야기가 차고 넘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그 범위가 더 넓어져 노년준비를 해야 하는 중년에 대한 이야기도 따라서 차고 넘친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은 노년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며, 아예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보니 그것은 어쩜 지금의 노년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한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많은 경우 노년을 무섭고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늘어난 수명, 노년 인구의 증가, 달라지는 몸과 마음, 부양의 문제로 인한 세대 간의 전쟁을 강조하니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죄의식을 지니게 될 나 자신의 노년이 무서울 수밖에 없다.

다음은 노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저 돈만을 이야기하는 경우이다. 재테크 아닌 노(老)테크에다가 노년준비자금 4억에서 6억에 이르면, 먹고살기 바쁜 보통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다 못해 노년 이야기를 지긋지긋해 한다. ‘지금 내 코가 석잔데 어쩌란 말이냐’ 하고 나앉는 것이다.

또 하나, 노년은 나와 상관없는 추상의 세계일뿐이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뛰어난 사람들의 잠언이나 경구를 모아 들려주며 한 단계 위로 올라오라고 권한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지만 나의 노년과 만나는 지점을 찾기 어려워 저만치 남의 이야기로 밀어두고 만다.

그리고 노년을 그저 가볍게만 그리는 경우도 있다. ‘뭘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생각해, 나처럼 쿨하게 살아봐!’ 애써 얻은 것이든, 저절로 물려받은 것이든 자기가 가진 것이 넉넉하니 그다지 고민이 없다. 그저 가볍기만 한 몇 가지 지침만으로 노년의 삶이 풍성해진다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도 아니면 엄격한 교훈의 나열이다. 시대와 세상을 한탄하며 나 살아온 것만이 정도(正道)라고 하니 받아들이기 어렵다. 삶의 진한 향기가 배어나오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이 없는 나이 든 사람의 그렇고 그런 교훈은 누구에게도 잘 흡수되지 않는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노년을 바로 보고, 나 자신의 노년 그림을 그려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런데 반갑게도 노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진지하게, 그러나 무겁지 않게 노년을 생각해볼 수 있는 TV 프로그램을 만났다.

지난 5월 4일(수) 자정에 방송된 KBS-1TV의 <수요기획 : 노인, 노인을 말하다>는 노년 혹은 노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구성된 다큐멘터리이다.

소제목들이 붙어있는데, “증후군”에서는 스스로 나이 듦을 느낄 때와 자신이 노인이지만 노인이 싫을 때를 이야기하고, “나는 없다”에서는 가족과 직장에서의 내 자리를 잃어버린 경험들을 털어 놓는다.

또한 “같이 안 살고 안 키운다”에서는 자녀들과의 동거와 별거, 손자녀 양육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이 드러난다. “지갑 속의 로맨스 그레이”에서는 노년의 고독과 이성 교제, 욕망, 재혼 등에 대한 나름의 이야기들을, “효의 지각 변동”은 부모 부양을 중심에 놓고 부모님을 집과 시설에 모시는 문제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황혼을 건너는 법”에서는 노년에 이르러 알게 된 삶의 진리 혹은 어떻게 노년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지, 서로 다르지만 결국은 하나로 통하는 지혜들을 모아놓았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노년이 노년을 이야기하되 결코 치우치지 않은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옳고 그름과 찬성 반대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자리에서 생각하고 경험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 말할 뿐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한 마디로 진짜인 것이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 꾸밈없이 말하는 게 전부인데도 그 진실함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은 만든 사람 자신의 진실이 함께 배어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중간 중간 소설가 이문열, 코미디언 김병조, 권투선수 홍수환씨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만나니, 반가움과 함께 ‘아, 저들도 이제 육십을 코앞에 두고 있구나’하는 깨달음에 이르고 결국 나이 듦의 공평함과 공정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균형 잡힌 시각은 인터뷰한 인물들의 배치에도 그대로 적용돼서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 비중에 신경을 쓰지 않고 유명인과 보통 사람의 인터뷰를 골고루 섞어 놓아 편안하게 따라가다 보면 평범 속의 진리에 이르게 되는 장점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인터뷰로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최소한의 내레이션을 넣었는데 그 내레이션이 간결하고 깊이 있어 가슴에 와 닿았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인터뷰에 응한 노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닮긴 성찰이다.

… 효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엄마만 예순 되지 내가 예순 될 줄은 몰랐지, 어느 날 거울을 보니 거울 속에 내가 아니라 우리 엄마 얼굴이 있는 거야, 그 때도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노인들이 나 때문에 소외감을 느꼈을 거야, 노년의 삶의 조건을 잘 만들어 놓는 것은 바로 너(젊은 사람들)를 위한 거지, 그런데 우리는 미리 준비를 못했어, 몰라서 …

만일 내가 이 프로그램을 미리 보았더라면 열심히 알려서 모두들 함께 보자고 했을 텐데 아쉽다. 그 아쉬움을 대신해 앞으로 노년을 알고 싶어 하고, 공부하려는 사람들과 만나면 이 프로그램의 녹화 테이프를 함께 보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모처럼 제대로 된 노년 이야기를 만나니 무엇보다 고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덧붙이는 글 | (KBS-1TV <수요기획 : 노인, 노인을 말하다> / 2005. 5. 4 밤12:00 방송 / 연출 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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