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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물간 코미디언'인 연극 속 노인들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플러그가 빠진 줄도 모르고 텔레비전이 안 나온다며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호통을 치고, 현관문의 잠금 장치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문을 열어줄 때마다 난리를 피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음대로 외출도 못한다. 배달된 우유 마시는 것을 잊는 것은 다반사이고,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릴 때가 있는 모양이다. 여기까지가 일흔 여섯 배청일 할아버지의 현재 모습니다.

또 다른 한 명, 관절염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는 김춘식 할아버지는 말끝마다 딸과 사위 자랑에 침이 튀는 줄도 모른다. 목에 힘을 잔뜩 주고 높은 소리로 쉼 없이 자기 자랑을 해대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웃음과 함께 배어 나오는 것은 연민 혹은 한심함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둘이 타는 외발자전거'라는 이름으로 43년 동안 코미디 계에서 명콤비를 이루었던 두 사람. 그런데 11년 전, 김춘식 할아버지가 아무런 설명이나 해명 없이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활동이 중단되었던 것. 배청일 할아버지는 그 일을 잊지 못해 원망과 미움과 분노를 품은 채 노년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방송사에서 추억의 옛날 코미디를 공연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자 두 사람은 '반대하지만'이라는 조건을 내세우며 응하게 된다. 연습을 위해 11년만에 만난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딪친다. 조카딸을 빼고는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배청일 할아버지는 아직도 영화와 뮤지컬, CF 섭외가 들어온다고 허풍을 치고, 김춘식 할아버지는 이에 질세라 딸네 집에서 구박받고 살고 있으면서도 자식 덕에 호강이 넘친다고 자랑을 한다.

연습은 싸움으로 끝났지만 공연 날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두 사람은 방송국으로 가 전성기 때의 히트작이었던 '엉터리 의사와 세금장이'라는 코미디의 리허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연습 때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싸움을 벌이게 되고 흥분한 배청일 할아버지가 그만 쓰러지고 만다.

마주치기만 하면 싸우는 두 할아버지를 보고 있으려면 해결되지 못한 감정이 노년의 삶을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고 망가뜨리는지 알 수 있다. 오래 전 김춘식 할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떠났을 때, 배청일 할아버지가 느꼈을 배신감은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분노의 덩어리가 되어 스스로를 가두고 만다.

그것이 곧 작은 아파트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사는, 사람을 향해 세상을 향해 문을 꽉 닫아버린 생활로 이어졌을 것이다. 옛날의 명성, 인기, 명예, 돈은 간 데 없고 홀로 남아 쓸쓸함을 뼈저리게 맛보고 있으려니 어딘들 아프지 않겠는가.

마음대로 사라져버린 김춘식 할아버지 뒤에 홀로 남겨진 배청일 할아버지. 전혀 원하지 않았고,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상태에서 '비자발적'으로 은퇴를 해야 했던 할아버지의 상처와 절망과 분노는 그 무엇으로도 쉽게 달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하던 일이 없어지고, 가족도 없는 데다가 다른 그 무엇도 준비하지 않고 살았으니 그 노년이 또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러나 김춘식 할아버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난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성의 있게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무서울 것 없고 거리낄 것 없었던, 그래서 평생 안 늙을 것 같았던 시절을 지나 눈이 침침해 지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걷게 되고 자식에게 구박받는 신세가 되고만 속절없는 세월을 이야기하는 그 모습에서 그때의 떠남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할아버지들의 굼뜬 행동과 터무니없는 억지와 유치한 말싸움에 다들 웃음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그 웃음 밑바닥에는 긍정보다는 부정이 조금 더 많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본다. 좋았던 지난날에 대한 지치지도 않는 회상과 그리움, 왕년에 한가락했다는 자랑, 가진 것 없는 빈 껍데기이면서도 멈추지 않는 과시, 상대에 대한 인정보다는 무시와 백안시 등등.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와 나누는 눈빛에 43년이라는 긴 세월을 동고동락해온 정이 깔려 있고, 으스대는 몸짓 저 안쪽에 숨어있는 서로의 외로움과 남루함과 병약함을 눈치채고 애틋해 하는 것을 알게 모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보는 사람에게 한 가닥 위안이 되었다.

아무리 젊은 시절 '날리는' 코미디언이었고,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연예계 스타라 해도 연극 속 노인들은 그럴 수 없이 후줄근하고, 자기 밖에는 모르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소리나 질러대는 밉상임이 분명하다.

두 할아버지의 화해를 위해 애를 끓이는 배청일 할아버지의 조카딸은 김춘식 할아버지를 한 번 만나볼 것을 권하면서 간곡하게 이야기한다. "그건 오늘이 아니면 안 되거든요!" 그 말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일까. 숨을 거두기 전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두 사람 사이의 묵은 감정을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런 대로 정리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공연 시간 2시간 20분이 길게 느껴진 것은, 관람시간 90분이라는 인터넷 예매 사이트의 정보가 틀렸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는 아니다. 노년도 마찬가지여서 눈에 보이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노년이 담긴 연극에서 생의 진정한 맛과 향기가 슬쩍이라도 배어 나온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제대로 된 노년 이해가 바탕이 된 연극을 만드는 일에도 조카딸의 말은 유효하다. 내일이 된다고 해서 노년 이해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니까. 그것 역시 바로 오늘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아쉬움이 남는 가운데서도 또 하나의 노년 연극이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라도 위로를 삼아야 하리라. 그것 또한 현실이므로.

덧붙이는 글 | (둘이 타는 외발자전거 / 원작 : 닐 사이먼 / 연출 : 김순영 / 출연 : 이창훈, 박기산, 박호석, 노현희, 백승철, 백주영 등 / 2005. 1. 15 ∼ 3. 13 창조콘서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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