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집으로...>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슬슬 차에 시동을 걸고 계신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명절만 되면 전국의 고속도로가 몸살을 앓는다는 뉴스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제법 머리가 굵어 대처로 나가겠다는 자식들을 떠밀다시피 보내놓고 하루하루 노심초사하셨던 부모님들이 몹시 그리운 사람들은 명절만 되면 차에 시동걸기 바쁘다.

그래봤자 길게는 하루요, 짧게는 한나절에 불과한 고향 나들이지만 그래도 명절만 되면 고속도로에 내다 버리는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사람들이 아직 내 주변에는 많다. 그러나 나처럼 찾아갈 고향이 뚜렷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도로 정체 소식은 남의 나라 일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추풍령을 넘지 못해 애간장을 녹이고 있다는 사람들이나 서울에서 부산까지 10시간도 넘게 걸렸다고 하소연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더라도 “엄청 막히나 보구나!”하고 감탄할 뿐, 이렇다할 동료 의식이나 곧이어 그들의 전철을 밟게 되리라는 두려움을 한번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고생을 마다 않고 고향을 찾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스스로의‘뿌리’를 끊임없이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뿌리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도 된다. 비록 부모님을 자주 뵐 수는 없지만, 명절이라는 좋은 구실을 통해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태어날 때부터 체득한 인간 본연의 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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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가끔은 나도 차안에서 기나긴 시간을 보낼지언정 그 행렬에 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를 애타게 기다리는 누군가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하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 가는 나이가 된 것일까.

<집으로...>의 상우(유승호 분)는 손자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외할머니의 손에 잠시 맡겨진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엄마가 상우에게 내린 특단의 조치는 바로 외가댁에서 지내는 것.

제대로 말도 못하는 할머니(김을분 분)와 같이 지내는 일은 도시에서만 자라온 상우에게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명절날 혹시라도 받게 될 세뱃돈을 기대하고 외가로 향하는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해맑은 표정이 녀석의 얼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미술관 옆 동물원>을 연출한 이정향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은 억지로 외가댁에 머물러야만 하는 아이와 말 못하는 외할머니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이야깃거리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영화가 흥행을 거뒀다는 것은 곧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관객들이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는 의사표시다.

<집으로...>는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경험들이 가득하다. 어두컴컴한 밤, 혹시 귀신이라도 나오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치며 누나 손을 꼭 잡고 갔었던 재래식 화장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의 추억. 그리고 변변한 가게 하나 없는 동네. 이 영화의 장점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이 겪어야 했던 문화적 충격을 상우의 맑은 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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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집으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문명과 비(非)문명의 충돌에 관해 언급한다. 비디오게임과 인라인 스케이트, 프라이드 치킨 등 어느새 우리의 입맛과 눈을 자극하는 문명을 한가득 안고 들어온 상우와 터진 옷을 바느질로 꿰매는 외할머니의 대조적인 모습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의 할머니들은 그래왔으므로.

생각해보건대, 요즘 영화들은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코스요리 뒤에 나오는 디저트처럼 그저 구색만 맞추는 감동으로는 관객들을 울릴 수 없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은 그만큼 어렵다. 만약 <집으로...>가 외할머니의 죽음으로 상우가 뉘우치는 장면을 넣어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려는 얄팍한 생각을 했더라면, 과연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을까?

국수 그릇을 엎어놓은 듯 반듯하게 자른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거울을 보면서 연거푸 쓰다듬는 장면이나 처음 보는 백숙을 쳐다보지도 않다가 몰래 부엌에 가서 헐레벌떡 먹어치우는 모습은 조금씩 시골 마을에 적응해가는 아이의 꾸밈없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너무나 흐뭇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반전은 철부지라고만 생각했던 상우가 말 못하는 외할머니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후반부에서 발견된다.

“어디 아프면 아무 것도 적지 말고 나한테 보내”라고 말하며 할머니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상우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눈물 한 줌이 괜히 잘난 척하며 만들어낸 인위적인 감동보다도 따스한 기억으로 회자되곤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가족’이란 모자라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무한정한 사랑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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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을 며칠 앞두고 <집으로...>를 보면서, 늘 자신들을 걱정하는 부모님을 찾아 떠나는 차들의 행렬이 문득 떠올랐다. 살아가면서 얻은 상처들을 치유하기 위해 따뜻한 사랑을 찾아 각자의 집으로 떠나는 사람들. 명절은 그런 사람들이 몹시도 부러운 날이다.

덧붙이는 글 | <집으로...> / 감독 이정향 / 주연 유승호 김을분 / 2001 / CJ / 87분 / 전체 관람가

2004-01-20 17:44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집으로...> / 감독 이정향 / 주연 유승호 김을분 / 2001 / CJ / 87분 / 전체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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