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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톨킨의 그 방대한 원작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한창 판타지 소설들이 쏟아져나오던 98년 즈음, 서점 한 구석에 서서 시간 때우기로 한권 집어들었다가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답니다. '시간때우기용 책'이 갖춰야할 덕목인 아무 생각없이 펄럭펄럭 넘기기가 안되는, 아주 난해하고도 복잡한 책이었으니까요.
중간계라는 아예 새로운 세상 하나가 새로이 만들어져 있고, 각 부족의 언어까지 모두 다르게 설계된 그 책은 저같은 판타지 문외한에겐 넘지 못할 산이었죠. 항상 읽어야겠다 생각만 하다가 넘기고, 넘기고 하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런 <반지의 제왕>이 영화로 나온다는 소식에 좀 불안해졌어요. 영화화하기 힘들텐데... 차라리 애니메이션이 낫지 않을까...(실제로 오래전에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니 작품이 만들어졌었습니다) 그러다 감독이 피터 잭슨이란 사실을 알고는 조금 안심이 되더군요. 뭐랄까, 비주얼로는 한가닥 한다는 감독이니까요.
원작을 읽지 않았으니 온전히 영화에만 기대어 말하겠습니다. 전 판타지물을 썩 즐기지는 않습니다만 세시간이 넘는 이 영화를 보는 시간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이상하게도 얄팍해 보이기 쉬운 여러가지 컴퓨터 그래픽들은 고전적인 카메라 트릭과 섞여서 아주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키 차이가 많이 나는 등장인물들을 한 화면에 잡으면서도 그래픽만 믿지 않고 상자 위에 올라서게 한다든지, 원근법을 활용한다든지 하는 구식 방법들까지 동원해서 존재감이 뚜렷한 화면을 만들어낸 것은 박수쳐주고 싶었습니다. 판타지를 만드는데 어마어마한 특수효과가 꼭 필요한건 아니라는걸 보여주는 장면이었죠. 물론 동굴 추적신같은 장면은 그래픽의 도움없인 불가능한 장면이었지만 말입니다.
톨킨의 중간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입니다. 피터 잭슨은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교류, 그들간의 암투 등을 잘 이해하는 톨킨 팬입니다. 영화에서 돌아다니는 프로도가 톨킨의 것이 아니라면 톨킨의 골수 팬 잭슨의 프로도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영화의 비주얼과 이야기는 톨킨의 팬들이 한번쯤 그려봤음직한 '바로 그런' 모양입니다. 스토리는 원작에 충실하고(그래서 삼부작이 되었지요) 비주얼은 원작과 개인적 상상 두가지에 반반씩 봉사합니다. 이런게 판타지의 좋은 점이기도 하지요. 화면에 개인적 취향과 상상이 베일 수 있다는 점이요.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드는 아쉬움은 완결되지 않은 영화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세 편 중 한 편만 본 것이니까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덜컥 영화가 끝나버리니 꼭 먹던 사탕을 뺏긴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 영화에 대해서 정확하게 평가하는 일은 세편이 모두 상영된 후인 삼년 후에나 가능하겠죠.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남은 두편의 영화가 이미 촬영이 끝났다는 사실이죠. 그러니까 이 정도의 영화적 질은 기본적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내년에 다음 이야기가 개봉되더라도 배우가 더 나이들어 보인다거나, 죽어서 새로운 인물로 대체해야 한다거나, 어린 배우들이 완전히 자라 변성기를 맞는 일 따위는 없다는 것입니다.(그런 점에서 <해리포터>는 불리합니다. 그 귀여운 아이들이 부쩍부쩍 자란다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중간계로 첫 발을 들여놓았으니 꼼짝없이 3년간은 이 세계에서 놓여나지 못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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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1 1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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