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면 갈무리
tvN 스토리
조광조의 정연한 논리를 반박할 수 없던 중종은 결국 대간들을 전부 교체하는 것으로 잘못을 인정했다. 이로써 조광조는 할말을 하는 언관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화려한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 부정과 모순을 바로잡으려는 조광조의 올곧은 모습은 연산군과 다른 왕이 되기를 갈망했던 중종이 꼭 필요로 하던 신하였다.
조광조 역시 중종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연산군의 폭정에 실망했던 조광조에게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고 반영하려는 중종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중중과 조광조는 경연을 통해 자주 만나며 점점 돈독하게 가까워졌다. <정암 조선생 행장>에서 퇴계 이황은 중중과 조광조의 관계를 두고 "오직 왕의 일만을 생각하는 신하로서, 착한 임금의 성대한 시대를 만나 상하가 서로 기뻐해 '천년에 한 번 있을 수 있는 좋은 때'라고 할 것"이라고 언급했을 만큼 서로 마음이 맞는 모범적인 군신 관계였다고 극찬하고 있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하며 불과 3년 만에 정6품에서 종2품 사헌부 대사헌(오늘날의 검찰총장)에 임명될 만큼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그렇게 조광조는 중종의 최측근이 돼 사림파의 정치적 리더로 파격적인 개혁 정책을 진두지휘하게 됐다.
그런데 불과 1년 후, 조광조의 운명을 바꾸는 충격적인 대반전이 일어난다.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이 돌연 한꺼번에 정계에서 축출당한 것이다.
조광조는 '붕당조성죄'로 의금부에 투옥된다. 임금의 무한신뢰를 받던 충신에서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중종이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으킨 의도적인 사건이었다.
중중은 왜 갑자기 조광조에게 등을 돌리게 됐을까. 조광조는 중중의 신임을 받아 권세가 점점 커지면서 특유의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운 성격 탓에 수많은 정치적 무리수를 저질렀다.
비록 조광조 본인은 그것을 '개혁'이라고 확신했고 다른 사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각만 옳다는 일방적인 독선에 빠졌다.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왕권의 권위마저 부정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건 바로 소격서(昭格署) 파동이다. 소격서는 조선 시대에 도교 식의식을 행하고자 설치한 정부기관이다. 조선은 비록 유교 국가였지만 불교나 도교식 제사는 중종 때까지도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고, 역대 왕실에서도 이를 신봉하는 이들이 많았다. 소격서는 정치적 기관도 아니었고 특별한 폐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엄격한 유학자였던 조광조로서는 도교에 기반을 둔 소격서를 용납할 수 없었다.
중종은 소격서 폐지를 단호하게 거부했으나 조광조와 사림파는 끈질기게 중종을 압박했다. 이에 중중은 '선왕인 세종과 성종도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았다'는 논리로 설득하려 했다. 전통과 질서를 무엇보다 중시하던 조선 사회에서 '선왕의 결정'까지 거론한 것은, 중종으로서는 가장 최상의 방어 수단을 꺼내든 셈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조광조는 '세종과 성종이 대성(성군)이라도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라고 반박하며 "전하께서 선왕을 핑계 삼는다면 자손들도 전하를 핑계삼을 것 '이라는 독설까지 서슴지 않았다.
왕권이 절대적인 조선에서 선대 국왕, 그것도 '성군의 대명사'로 꼽히던 세종과 성종마저 '잘못은 잘못'이라고 거침없이 비판한 것은, 신하가 대놓고 왕권을 능멸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 또한 조광조는 홍문관 관원들과 철야시위를 벌이며 중종의 수면까지 방해했다. 결국 중종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소격서 폐지를 수락했지만, 이 사건으로 조광조에 대한 무한 신뢰에는 금이 가기 시작해다.
조광조의 정치 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