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잠자리 구하기> 스틸 이미지
디오시네마
감독은 2014년 고3 시절부터 2021년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까지 8년 동안의 자신과 주변 풍경을 카메라로 담았다. 물론 매년 일기장 열람하듯 화면에 연대기적으로 전시하지는 않지만, 화면을 보고 있자면 저런 상황까지 용케 기록하고 보여줄 생각을 했구나 싶을 만큼 은근히 파격적인 순간들이 많았다.
시작은 대입수학능력시험을 50일 정도 앞둔 교실에서부터다. 감독과 친구들은 왁자지껄하게 희비가 교차하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고3 수험생이란 도매금으로 취급하기엔 인문계와 예체능계 지망이 다르고, 수시와 정시 비중에 따라 팔자가 바뀐다. 침울하고 적막만 휘감고 돌 것 같지만 의외로 요란법석 흥겨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렇게 후루룩 지나치는 수다 속에는 절망과 비탄, 불안과 초조감이 가득하다. 시험날짜가 다가올수록 그런 시끄러운 공포는 겉잡을 수 없이 가중된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성적이 공개됐다. 감독의 친구 중 누군가는 수능시험을 포기했고, 누군가는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그리고 감독은 몽땅 다 떨어졌다. 속된 말로 망한 것이다. 그런 운명의 갈림길은 친절하게 자막으로 화면 한가운데 떡하니 표기된다. 자학도 이런 자학이 없을 지경이다. 대한민국 70%(실업계나 등 30%는 수능을 치지 않으니)의 19살 또래들 인생이 마치 그 전후로 결착되는 느낌이다. 친구들은 겨울 우정여행을 떠나지만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축제'가 될 것임을 아직 알지 못한다.
감독은 용케 한 대학에 붙었지만, 부모님은 재수를 권한다. 폭망한 수능 성적만 아니면 평소 클래스로 재도전할 만하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독과 일부 친구들의 재수 생활이 시작된다. 우울하기 짝이 없다. 정해진 궤도를 따라 중력에 이끌리던 일상이 아니라 유배된 것 같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 친구들과 오랜만에 재회하지만, 이제 그들과 감독은 다른 궤적을 향하고 있다는 것만 확인할 뿐이다. 누군가는 아르바이트, 누군가는 연애를 시작했지만 정작 감독은 어정쩡한 어딘가에 파묻혀 있다.
대학에 입학하면 해결될 줄 알았던 위기의 본질
다행히 1년 재수 후 사회 어딜 가서 소개해도 그리 꿀리지 않는 예술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제 까먹은 시간 보충하며 열심히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 이후로 감독은 이미 고등학생 시절부터 징후를 드러내던 위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한 번 붕괴한 궤도는 회복되지 않고,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 초라해진 감독은 대학 시절을 어릴 적 본인이 꿈꾸던 지망처럼, 타인을 돕고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메우고자 시도한다.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때마침 우리 사회를 뒤흔든 사회운동에도 참여한다. 그 광장에서 감독은 여전히 쓸쓸히 구석에 웅크리며 길을 찾지 못한다.
원래 감독을 잘 알던 이들이 아니라면, 그저 사회운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평상시에도 잘 웃고 떠드는 영화 전공 대학생일 뿐이다. 물론 화면 속에서 감독은 자신이 종종 주변 사람들과 종종 충돌하며 대판 싸우곤 한다며 고백한다.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지만 이제 각자의 삶을 살게 된 친구들은 감독에게 큰 힘이 되어주진 못한다(이는 감독 역시 매한가지다). 그들은 각자의 궤도를 따라 외우주를 떠돌 뿐이다.
얼핏 화려해 보이는 대중의 바다에서 외로운 섬처럼 부유하던 감독은 그 빛의 바다를 벗어나자 겉잡지 못할 격랑에 휩싸인다. 이제 옛 친구들과도 소원해졌고, 부모님에게도 차마 전할 수 없다. 어릴 적 들었던 동급생의 죽음이 떠오른다. 당시엔 별 느낌 없었는데 유독 이제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하소연하던 친구의 사연이 소환된다. 감독은 마포대교로 향한다. 난간을 움켜쥔다. 이후 계속 홀린 듯 틈만 나면 마포대교를 찾는다. 영화는 그렇게 실존 위기에 처한 감독이 자신의 8년을 고백하는 영상 편지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참혹한 자신을 기꺼이 드러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