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 컷
연분홍프로덕션
극 중에서 병호의 트라우마는 말 대신 몸으로 표현된다. 병호는 느닷없이 달리고 이명과 두통에 시달리고 벌컥 화를 내며 기억을 자꾸 잃는다. 그 모든 일에 지친 듯 병 호는 세월호 선체 안에 망연자실 누워 허공을 바라본다. 그는 참사를 일으킨 이 사회가 가한 고통에 무너진 듯 보이고, 한편으로는 참사로 세상을 떠난 딸의 마음을 온몸으로 느껴보려는 듯도 보인다. 그런 병호의 얼굴을 딸의 손이 다정히 쓰다듬는다. 병호를 무너뜨린 고통은 병호가 싸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 세월호 안에서의 촬영은 그 현장을 몸으로 느끼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보는 나도 힘든데 연기하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싶었어요.
"쉽지는 않죠. 신(scene)을 준비하면서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여러 가지로 고민하죠. 현장에 가면 그 생각을 다 잊어야 해요. 머리가 발동하면 연기가 곤란해져요. 그날 연기할 때는 몰랐는데, 끝내고 보니 동수 아버지가 제 연기를 지켜보고 계셨더라고요. 선내 촬영이다 보니 해수부 직원이 동행해야 해서 동수 아버지도 같이 계셨던 거였어요. 모니터 감독 옆에서 촬영된 영상을 보시다가 못 보겠다고 괴로워하시더라고요."
- 가족협의회에서 시사회를 할 때 가족들 표정을 봤는데, 다들 괴로운 얼굴이셨어요. 트라우마가 생생히 표현된 장면들을 보는 게 힘드시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시 사회가 끝나고 몇 분께 여쭤보니 오히려 본인들의 고통 이 잘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호평하시더라고요.
"어떤 마음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상처가 어떻게 없어지겠어요. 시간이 흘러도 바로 어제 일 같이 느껴지는 날들일 텐데. 잊지 않고 고스란히 그 현실을 감당한다는 게 어떤 건지 저는 당사자가 아니니까 다 알 수는 없죠. <목화솜 피는 날> 시사회에 세월호 어머님들이 와서 보시고 "뼈마디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아파도 외면하는 게 아니라 그걸 마주해야 하는 일로 받아들이시잖아요. 굉장히 강인한 모습이라 생각해요. 그러니 이렇게 버텨오실 수 있었겠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다른 분들도 힘을 얻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참사 이후 그 긴 시간 싸워온 점에 대해 가족들도 자부심을 느끼실 거예요. 한편으로 여전히 내 안에 엄청난 고통이 있는데 10주기쯤 되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고통의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게 아닐까 불안한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요. 남에게 꺼내 보여줄 수 없는 고통을 이 영화가 생생히 보여주고 있어서 가족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게 이야기의 역할인 것 같아요. 아직도 창작자들한테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이야기가 풀어내기 간단한 소재일 수가 없거든요. 어쩌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너와 나>를 찍은 조현철이라는 후 배가 아주 내성적인 친구예요. 같이 드라마 찍으면서 처음 만났는데, '이 친구 뭐지?' 싶은 구석이 있었어요. 드라마 끝나고는 개인적인 연락을 한 번도 안 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오더니 "선배님 대본 하나 보내드릴 건데 좀 해주십시오" 그러는 거예요. 자기가 2014년 4월 16 일부터 계속 반복적으로 꾸는 꿈이 있는데 그걸 이야기로 풀지 않으면 안 되겠더래요. 그게 <너와 나>였고 거기서도 제가 아버지 역할을 했죠. <너와 나>는 조현철이니까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또 5년 10년이 지나면 세월호참사에 대한 세상의 기억이 더 옅어지겠죠. 그럴 때 또 다른 시선의 2014년 4월 16일의 이야기들이 분명히 나올 거로 생각해요. < 목화솜 피는 날>이라는 영화가 세월호 이야기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은 생각을 하던 분들한테 어떤 기점의 역할은 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 현장을 경험하셨잖아요. 그런데도 좀 새로운 현장이었을 것 같아요. 피해자들이 함께 기획한 프로젝트이고 4.16가족극단 '노란리본' 어머니들이 직접 배우로도 참여하셨고요.
"유가족들이 영화에 함께 참여해 주셨기 때문에 영화가 더 힘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래도 표현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잖아요. 우리끼리였다면 주저하고 답도 못 찾고 고민만 하다 시간을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그분들이 나서주셨기 때문에 그 힘을 받아서 앞으로 갈 수 있었죠. 그 힘이 진짜 컸어요.
노란리본 극단이 대학로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할 때 <목화솜 피는 날>에 함께 출연한 우미화 배우랑 최덕문 배우와 같이 보러 갔어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무대 위에서 흠결 없는 연기와 매끄러운 주고받기를 보여주는 게 그분들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기성 극단에서 할 수 없는 아주 분명한 에너지가 어머님들한테는 있어요. 공연 끝나고 저희가 대학로 연극 선배 입장에서 대학로에서 공연한 분들이라면 '림스치킨'에서 김치 쫄면은 드셔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모시고 갔죠. 맛있게 드시더라고요. 뿌듯했어요. (웃음)영화 출연이 인연이 되어서 단원FM(안산 공동체라디오)에 도 출연했어요. 윤희 어머니와 은정 어머니 두 분이 라디오 디제이를 하시는데, 잘하시더라고요. 원고도 잘 쓰시고. 이 방송도 노란리본 극단처럼 조금 더 시간이 쌓이면 아주 분명한 자리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라디오 녹음이 끝나고 나오는데 선물을 주시는 거예요.
4.16목공방에서 만든 고양이 발 모양의 등긁개더라고요. 아내가 너무 좋아했어요. 네가 받아온 선물 중에 가장 좋다고. (웃음) 너무 좋았어요. 저나 집사람이나 등긁개 가 너무 필요해서 잘 쓰고 있습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영화가 배우님께는 무엇을 남겼나요?
"<목화솜 피는 날>이라는 작품이 저에게 들어왔고, '병호'라는 역할을 직업 배우로서 수행했어요. 제가 여타 드라마나 영화에서 했던 작업하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요. 근데 다른 작품들은 시간이 지나면 휘발이 돼요. 때로 몇 년이 지나면 내가 그걸 했었는지도 가물가물해지기도 해요. 왜냐하면 계속 다른 작품들로 그 기억이 덮여가니까. 그런데 <목화솜 피는 날>은 오래오래 제 기억에 또렷이 남는 작품이 될 거예요.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제가 각 별히 기억하는 작품 중 제일 앞에 놓여 있어요. 세월호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나서, 제가 배우로서 이런 인연을 만났는데, 시간이 지나서 만약에 이런 인연이 저한테 또다시 온다면… 그때도 잠깐 고민하고 또 하게 되지 않을까요. (웃음)"
"제가 서 있는 곳은 단원고 남학생들이 있던 객실입니다. 이 방에 열 여섯 명이 있었어요. 다 엉켜서. 잠수사들이 풀어지지 않는 학생들을 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엄마 보러 가야지' 아이들의 핸드폰에 가장 많이 남아있던 영상이 당시 갑판 위 불꽃놀이 영상이었어요. 이곳에서, 마지막 밤이었죠. 시간이 지나더라도, 꼭 기억해 주세요" - <목화솜 피는 날> 병호의 대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