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거장'들의 새로운 영화들에는 몇 가지 공통분모가 관측된다. 거칠게 뭉뚱그려보자면, 오랜 세월과 수고를 거쳐 확립한 근대 민주주의 시스템의 위기가 첫 번째다. 특히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의회에서 정책 논쟁을 통해 극단적 유혈대립 대신에 합리적 좌파 vs 우파 논쟁을 정착시켰던 유럽의 정치체제가 위험하다는 진단이 유독 두드러진다. 그와 동시에 극단주의자들이 세를 넓혀 가는 문제, 특히 극우파의 준동에 대한 깊은 우려가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희생양 삼아 나날이 늘어가는 차별과 혐오 문제 역시 단골 소재다. '희생양 찾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런 정략적 선동에 권력을 획득하려는 극단주의 정치인이 앞장서고, 복지국가와 경제사회 시스템 위기에 피해를 얻은 서민들이 억하심정으로 편승한다. 여기에서 과거 나치독일이 유대인을 먹잇감으로 삼은 것처럼 합리적 판단이 아니라 '만만한' 상대를 찾게 마련이다. 체제의 위기를 불러온 대자본의 이권 장악이나 정치인들의 무사안일 혹은 부패가 아니라 '외부의 침입자'를 악마화한다. 난민이나 이주노동자의 저임금 노동력은 쓰고 싶지만, 시민권 부여는 내키지 않는다.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혐오증이 동시에 일어난다. 하나하나 짚어보면 이율배반인데도 즉자적 감성에 호소하는 이런 선동은 레퍼토리 바꿔 가며 끝없이 이어진다. 이런 선동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면 정작 시급한 문제들, 건설적인 사회연대나 대안적 시스템 개편에 대한 논의는 뒷전이기 일쑤다.
그런 민주주의의 위기와 사회적 관용의 저하를 각국의 거장 감독들은 깊은 통찰과 오랜 경험으로 꿰뚫어 보면서 자신들의 작업에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 각자의 근심과 고민을 녹여낸 결과물을 연거푸 선보이는 중이다. 이탈리아의 50년 구력 거장 난니 모레티 역시 그 일원일 테다. 그의 신작 <찬란한 내일로>는 켄 로치나 다르덴 형제 같은 영화 친구들에게 응답하는 이탈리아 영화계의 대답이라 할 만하다. 한국에선 늘 과소평가되어온 이탈리아 영화의 저력과 함께 거대한 역사적 실험의 유산이 농도 짙게 녹아있는 거장의 신작은 늘 보는 이를 흥분하게 만든다.
남편 신작 대신 신예 감독 차기작 제작 맡은 아내
관록의 고참 감독 '조반니'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신작 촬영을 시작한 상태다. 어느 감독이 안 그렇겠냐마는, 조반니 역시 자신의 작품 제작에 말 그대로 모든 심신을 쏟아붓는 유형이라 바짝 긴장되고 예민해진 상태다. 40년 동안 그런 조반니와 공사를 막론하고 함께 해 왔던 아내이자 제작자인 '파올라' 역시 부담이 가득한 상황이다. 조반니는 촬영 현장에서 완벽주의 감독답게 이것저것 빈틈을 찾아내며 역정도 내고 흥분도 하면서 분위기를 긴장시킨다. 적지 않은 영화를 연출해 왔지만 시대극인 이번 신작에는 특히 공을 많이 들인 모양새다.
그런데 이 바쁜 와중에도 아내이자 제작자 파올라는 남편의 신작 대신에 다른 주목받는 신예 감독의 차기작 제작을 맡았다. 게다가 파올라는 남편 모르게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공적으로 이 부부는 둘도 없는 영화 동료이지만 그들 사이에서 사적인 고민을 공유하지 않은 지 오래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게 행동하지만, 균열은 봉합되어왔을 뿐, 언제고 위기가 닥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조반니의 신작은 1956년 소련의 내정간섭에 저항한 헝가리 노동자와 청년들의 봉기를 배경으로 다룬다. 역사의 잊힌 장이지만 조반니에겐 중요한 의의가 되는 사건인 듯하다. 시대극인 만큼 신경을 써야 할 게 하나둘이 아니다. 조반니는 당시 신문기사 제목 작명이나 의상 고증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챙겨가며 스태프들을 들볶아댄다. 파올라 대신 영입한 새 제작자 '피에르'는 의욕이 넘쳐서 조반니를 들뜨게 하지만 뭔가 허술해 보이는 구석이 계속 드러나기 시작한다. 주연 배우들과 연기론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파올라의 제작현장에 들렀다가 자신이 동의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폭력 표현에 참지 못하고 무리한 간섭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 난동을 참지 못한 파올라는 조반니에게 이혼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사건은 하나가 터지면 곧 둘이 따라오는 법이다. 피에르는 알고 보니 제작비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해 제대로 사고를 쳐 퇴장하고 만다. 어떻게든 제작을 이어가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순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투자 미팅이 잡힌다. 하지만 조반니가 자존심을 구겨가며 제작비 마련을 위해 양보해 보지만, 손익 계산기와 데이터 통계로 영화 제작을 판단하는 투자자 후보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고수하며 조반니가 지난 세월 '작가'로서 고수해 온 것들을 포기하고 투항하길 종용한다. 점점 감독은 지쳐간다. 그는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연약한 약점들을 어렵게 입 밖으로 꺼내고, 별거 상태에 돌입했지만 오랜 세월 동반자로 함께 해 왔던 파올라는 조반니의 신작 시나리오 결말이 석연찮아 마음을 졸인다. 과연 그의 신작은 완성될 수 있을까?
세계영화사의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영화적 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