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슬리에게> 스틸 이미지
㈜영화사 진진
이제 주인공은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동네 외곽 모텔 인근에서 자신의 모든 소유물이 든 분홍색 캐리어 하나 의지해 노숙하는 신세다. 그나마 아침 해가 뜬 직후 모텔 직원의 채근에 캐리어도 놓친 채 허둥지둥 도망치고 만다. 그런 뒷모습을 측은히 지켜보던 중년의 모텔 직원 '스위니'는 동료인 '로열'과 함께 주인공이 두고 간 캐리어를 풀어본다. 로열은 이곳 출신이라 레슬리에 대해 혐오스런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의 사연을 스위니에게 알려준다.
이야기를 듣고 난 스위니는 그가 못내 마음이 쓰인다. (이유는 레슬리가 갱생을 위한 노력에 돌입한 후 스위니와 가까워지면서 하나둘 드러난다.) 엉겁결에 놓고 간 짐을 찾으러 모텔 주변을 뒤지던 레슬리를 발견한 스위니는 그에게 느닷없이 부랑자에 가까운 이들에게는 절대 제공될 리 없는 조건으로 일자리를 제안한다. 딱히 사람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은데 비록 급여는 적지만 숙식을 제공하는 조건이다. 지금의 주인공에겐 안성맞춤이다. 레슬리도 일자리 제안에 반신반의하며 이게 웬 떡이냐 싶을 정도다.
그렇게 갈 곳 없던 레슬리는 모텔에서 일하게 되지만 한번 망가진 그의 생활패턴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측은한 시선으로 스위니가 가불해준 돈으로 밤마다 술을 마시고 거듭 사고를 친다. 로열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선 사업하는 셈치고 스위니가 마련해준 편한 일자리도 성실하게 수행할 리 없다. 알람이 문제라며 늘 술에 취해 늦게 일어나고 근무태만은 기본이다. 게다가 뒤숭숭한 심정을 늘 술에 의지하다 보니 그만 술집에서 취해 인사불성이 되곤 한다. 그때마다 스위니가 찾아서 데려와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사람 좋은 스위니의 인내심도 그만 한계에 달한다. 과연 레슬리는 이대로 몰락하고 마는 걸까?
결국 각자 삶에서 결정적인 건 스스로의 의지
레슬리는 싱글 맘으로 아들 제임스를 키우며 여유 없이 살긴 했지만 복권에 당첨되는 행운을 누릴 때까지만 해도 꿋꿋하게 살아온 것으로 묘사된다. 지금은 그를 극도로 혐오하게 된 동네 친구 낸시도 이전의 레슬리는 인기도 많았고 자기 앞가림은 충분히 해내던 존재라고 인증할 정도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행운은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레슬리는 일확천금을 번 덕분에 절제를 잃고 술독에 빠진다. 알코올 중독으로 판단력이 흐려져 당첨금도 날려먹고 주변에서 비난을 받자 스스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급기야 이제 갓 10대가 된 어린 아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듯 고향을 떠났지만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이상 추락할 일은 없을 줄 알았던 레슬리에겐 본격적인 무저갱의 시작일 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것에서 끝나지 않고 가족과 이웃들의 신용까지 전부 잃어버린 레슬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 갈피도 잡을 수 없어 그저 도망치는 것으로 일관할 뿐이다. 여기까지면 인생의 중반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채 스스로를 망치는 전형적인 군상 그 자체라 하겠다. 하지만 영화 속 상황을 보자면 레슬리는 과거, 그리고 현재에 그나마 기대고 의지할 곳이 있다. 과거엔 자신의 어머니나 한때 가족처럼 절친한 친구였던 낸시와 그의 반려자 더치 같은 이들이 분명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게 드러난다. 어머니가 버리고 떠난 아들 제임스도 훌륭하게 자립해 어느새 어머니를 배려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자기파괴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며 그들의 손길을 거듭 뿌리치거나 배반하고 만다. 어머니에겐 자신의 영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죽기보다 싫다. 과거엔 부랑자에 가까운 처지로 복권에 당첨된 레슬리에게 도움을 받았던 낸시와 더치 부부는 가족처럼 레슬리의 아들을 돌봐주고 그에게도 피난처를 제공하지만 불편한 마음에 독설을 거듭 내뱉는다. 서로의 신세가 역전된 것이 내심 견디기 힘든 것이다. 아들과는 잘해보고 싶지만 자격지심과 무절제로 거듭 상처를 입힌다. 그로 인해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뿐더러, 혐오의 대상으로 추락하고 만다.
하지만 인생에서 마지막 동아줄인 것처럼 최후의 기회가 깃든다. 마치 변장한 천사와도 같은 스위니와 로열의 도움으로 길바닥에 나앉을 위기를 모면하고 자립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어긋난 자존심 탓에 번번이 굴러온 복도 차버리곤 한다. 마음이 비뚤어진 채 한번 무너진 삶을 되돌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 세상사를 예시하듯 레슬리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주변을 물어뜯고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영화 속 레슬리의 추락은 본인의 의지력 문제와 비뚤어진 자존심에서 기인한 것임을 굳이 미화하지 않는다.
'레드넥'의 고향을 충실히 묘사하는 영화 속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