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류성희 미술 감독.
부산국제영화제
"포트폴리오를 들고 수없이 많은 제작사를 찾아다녔는데 멜로영화를 하라며 거절당했다. 그때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그 인식과 문화를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성이 만든 장르 영화도 독창적이고 강렬할 수 있다. 인간사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있다."
지난 2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후원사 샤넬이 공동 제정한 까멜리아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된 류성희 감독은 차분한 어조로 소감을 전했다. 류승완,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최동훈 감독 등 한국영화 황금기를 끌어온 감독 곁엔 대부분 류성희 미술 감독의 손길이 있었다. 2016년엔 <아가씨>로 제69회 칸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인 최초로 벌칸상(기술 부문 영화인에게 수여)을 받기도 한 류성희 감독은 명실공히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영화인이다. 5일 부산 해운대구 영상산업센터에서 류 감독이 국내외 취재진을 만나 자신의 철학과 꿈을 밝혔다.
판타지와 현실 추구 사이
미국영화연구소(AFI) 출신이기도 한 류성희 감독은 짧게나마 독립영화 작업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한국에서 도예를 전공한 후 영화 미술을 공부하게 된 류 감독은 미국에서의 앞날 대신 돌연 귀국을 택했다. 여성 영화인, 여성 핵심 스태프의 불모지와 같았던 당시 한국을 택한 것에 그는 "영화적 판타지를 꿈꾸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은 서부 영화를 맡게 됐는데 사막에서 서로 총을 거칠게 쏘다가 다 죽는 이야기였다. 정말 힘들게 일했는데 그때 문득 내가 왜 여기에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작게나마 재능이 있다면 서양인의 작업을 답습하고 비슷하게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실패를 해도 내 작업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날밤 <동사서독> <동방불패> <백발마녀전> 등 홍콩 영화를 몰아봤다. 남성성도 여성성도 아닌 중성 느낌의 영웅이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이슬 맞고, 굶어 죽더라도 한국에 가자 결심했다."
그렇게 돌아왔던 한국, 당시 영화계는 여성 미술 감독이라고는 단 한 명 뿐이었다고 한다. 여러 제작사에 장르 영화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가 거절당하기 일쑤였던 차에 류승완 감독이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여성이 전면에 나서 액션을 벌이는 당시에도 획기적이었던 <피도 눈물도 없이>(2002)를 시작으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최동훈 감독 <암살> 등 내로라하는 감독과 작업을 이어가게 됐다.
"기성 제작자들이 절 거절하는 대신 새로운 감독들이 절 택했던 것 같다. 종종 이 산업에서 여성의 성공은 우연이라고 여겨지곤 했는데 그걸 막기 위해 전 10년간은 장르영화만 하겠다고 결심했다. 정말로 여러 장르 영화를 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서 여성 인력이 많아졌고, 성별 아닌 실력으로 평가받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영화산업에서 말이다. 단계적으로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제가 특별한 천재도 아니고 남녀를 떠나서 좋아해서 시작한 일인 만큼 조급해하지 않고 하다보면 장인이 돼 있지 않을까 싶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면 머리 하얀 분들이 미술상을 받곤 하잖나. 제 목표는 탁월함이다. 한 분야에서 탁월함을 보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목표하고 꿈꾸는 바를 분명하게 잡고 박차를 가하면 어느새 사회적 편견은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 편견 자체에 맞서면 나가떨어질 수 있으니 일종의 돌파해야 하는 관문으로 생각하며 일했던 것 같다."
평소 작업에 들어가기 전까지 대본을 꼼꼼하게 읽는 것으로 잘 알려진 류 감독은 첫 관객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언급했다. 대본을 처음 받아 두 번째 읽기까지 드는 감정을 잘 메모하고 간직한 채 본격적으로 자료조사에 들어가는 식으로 작업해왔다고 한다.
"제 일을 전 고고학적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엄청난 양의 자료를 조사한다. 하지만 동시에 판타지잖나. 역사학자가 아닌 판타지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그 과정을 거치고 기쁜 마음으로 프리 프로덕션 단계를 맞이한다.
사실 지난 10년간 제 세계를 직접 연출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그간 감독님들의 세계관을 구현하는 지원자 역할이었으니 내가 그리는 세계가 궁금했었다. 근데 지금은 그 마음을 옆으로 두고 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관객과 소통하고 있으니, 제 역할을 잘해서 한국영화에서도 멋있다 할 수 있을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다."
'여성' 미술 감독 아닌 미술감독 류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