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딸에 대하여>의 주인공 정은(오민애 배우)
찬란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음식을 만들고, 먹고, 나눠주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식탐이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나 책을 볼 때 음식이 등장하면 마치 흑백 배경 속 유일한 컬러 오브제처럼 눈에 톡 들어온다.
영화 <딸에 대하여>에는 많은 음식이 등장하는데,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내내 머릿속에 그 생각들이 맴돌았다. 영화 속 음식들을 중심으로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긴 글이 됐다.
노인전문요양병원에서 일하는 엄마 정은(여/오민애 배우)은 자신이 돌보는 어르신(여/허진 배우)을 마음을 다해 모시는 노련하고 성실한 요양보호사다. 자신의 일을 기계적으로 행하기보다는 늘 섬세하게 임하는 만큼, 다른 요양보호사들에 비해 더 많은 시간과 물품을 사용하게 되면서 관리자로부터 눈총을 받곤 한다.
어느 날 그녀의 딸이 '엄마 집 담보로 전세보증금을 좀 마련해달라'고 부탁하는 연락을 해온다. 하지만 정은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전혀 없다. 결국 정은은 달리 방법이 없으니 일단 내 집에서 같이 지내자 제안하고, 딸(임세미 배우)은 자신의 레즈비언 애인(하윤경 배우)과 함께 정은의 집으로 들어온다.
정은의 딸은 '그린', 그 애인은 '레인'이라는 닉네임으로 서로를 호명하고, 그들의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은 정은과는 너무도 달라 낯설기만 하다. 그린은 대학 시간강사, 레인은 요리를 공부하며 글을 쓰는 프리랜서로, 둘 다 안정적 경제 능력은 부족한 상태다. 그린과 레인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부당 해고당한 선배를 위해 투쟁 중이고, 정은에겐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결국 발각되어 모녀는 말다툼을 한다.
요양병원에서 정은이 맡아 돌보는 어르신은 과거 전 세계 소외아동을 후원하는 재단 활동을 하며 존경받았던 인물이나, 현재는 자신을 돌봐줄 가족이 전혀 없는, 한마디로 무연고 노인이다. 효율과 수익만을 우선시하는 요양병원 입장에선 그 어르신도, 정은도, 눈엣가시에 불과할 뿐이다. 정은은 자신이 며칠간 출근을 못 한 사이 어르신이 알 수 없는 요양원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어렵게 수소문 끝에 찾아내지만 너무도 달라진 모습으로 누워계신 어르신을 보곤 충격에 빠진다.
음식도, 말도, 상대가 수용 가능할 때 건네는 것
그린과 레인의 입주 이후, 정은의 부엌엔 평소 볼 수 없었던 드립 커피 도구와 아기자기한 주방용품들이 놓이기 시작한다. 수박을 조각으로 잘라 접시에 담아서 먹을 의욕조차 없어서 수박 반 통을 그냥 놓고 멍하니 수저로 푹푹 떠서 먹었던 정은에게, 한없이 여유로워 보이는 그린/레인 커플의 아침 주방 풍경은 참으로 이질적이다.
나는 냉큼 화면 속으로 뛰어 들어가, 정은에게 속이 부대끼지 않을만한 음식들로 한 상 차려주고 싶었다. 내가 그런 오지랖 넘치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린/레인 커플이 정은에게 권하는 음식들은 너무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 늦은 저녁 무렵 '생각보다 맛이 괜찮으니 드셔보시라'며 권하던 파스타
- 아침부터 온통 고민과 피로감에 속이 부대낄 정은에게 '금방 내렸다'며 권하는 커피
- 브런치 카페에서 팔 법한, 세련되고 예쁘게 플레이팅된 수플레 팬케이크
그 모든 음식이 적어도 내 기준엔 정은에게 도달할 수 없는 음식들이었다(결코 지금 그녀의 위장이 소화해낼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모두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좋아할 만한 음식들이지만, 그것은 마치 여우가 두루미에게 납작한 접시에 담아 권하는 음식처럼, 찌르는 듯한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장면들을 보는 내내 '속이 온통 복잡할 사람한테 저걸 권하고 싶냐'는 혼잣말을 입속으로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나라면 부드러운 계란찜과 갓 지은 쌀밥에 버섯을 띄운 미소 된장국, 혹은 뜨거운 보리차에 끓인 찹쌀 누룽지와 김 장아찌로 상을 차려주고 싶었다.
어찌 보면 음식이란 언어와도 비슷해서, 말이든 음식이든 누군가에게 건넬 때는 상대가 수용 가능한 상태인지(모국어가 무엇인지/청력은 어떤지)를 충분히 파악한 후에 건네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출발어가 아닌 도착어를 기준으로 마음 쓰고 그렇게 행하는 것. 모름지기 돌봄 월드의 네이티브 스피커라면 출발어(원어)를 고집할 게 아니라, 도착어(번역어)를 위주로 사고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화면 속 젊은 커플을 내내 괘씸히 여기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까탈스런 식구들 간식 심부름하며 온갖 타박과 불만을 소화해온 노하우를 가진 나로선 '성공적으로 비위 맞추기'에 대한 욕망이 있는 편이라, 그린/레인 커플을 더욱 못마땅히 여겼던 것 같다.
'덜거덕' 입에 넣어주는 알사탕의 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