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색 - 화이트' 스틸 이미지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세 가지 색> 3부작 중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화이트>는 여러모로 연작 가운데 이질적인 질감으로 분류되는 작업이다. 프랑스의 국기 색깔과 그에 얽힌 유래를 이미지로 재현한 3부작 가운데 가장 시사적인 주제를 담당한 <화이트>는 <블루>와 <레드>에 비해 좀 더 주제 의식이 노골적이고, 블랙 코미디 요소를 짙게 드러낸다.
모두 준수한 평가를 받는 3부작 가운데 굳이 따지자면 가장 저평가되는 작품이라 봐도 무방할 테다. 하지만 삼색기를 구성하는 세 가지 색 중 어느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작품이 상징하는 '평등'의 문제는 다른 연작들과의 조화를 연상하며 소화할 때 진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겠다.
영화가 제작될 당시, 동과 서를 분리하던 철의 장막은 활짝 열리고 유례없는 개방이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폴란드 남자 카롤과 프랑스 여자 도미니크는 헝가리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국적도 배경은 달라도 청춘 남녀는 사랑과 노력만 있다면 어떤 장애물이건 돌파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프랑스에서 함께 살게 되자 카롤은 도미니크를 성적으로 만족시키는 데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만 거듭할 뿐이다.
원인을 찾아보려 해도 '고개 숙인 남자' 카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펼쳐도 성인 남녀의 부부생활에서 이는 치명적인 결함일 수밖에 없다. 결국엔 이혼을 당하는 처지로 추락한다. 가진 것 다 잃은 무일푼에 불어도 서툴다. 그제야 카롤은 가난한 동유럽 이방인의 신세를 절감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재결합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그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일단 고향에 돌아가 재기해야 하지만 귀국할 길도 막막하다. 기상천외한 귀향은 사람=물건 무게로 대입되는 자본주의 법칙 덕에 가능해진다.
영화는 전혀 낭만적인 판타지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카롤은 돈을 벌고 성공해야 한다. 불법까진 아니라도 그 경계선의 방도를 활용해 그는 기회를 거머쥐고 목표로 했던 부자가 된다. 그가 성공하자마자 구매한 근사한 차는 바로 (프랑스를 상징하는) '볼보'다. 그는 미용사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지만, 본업으로는 아무리 애써도 큰돈을 만질 수 없었다. 그가 성공에 이르는 열쇠를 얻은 건 불법적인 거래를 일삼는 브로커의 경호원 일을 통해서였고, 비밀 정보를 통해 부동산 투기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기존 질서가 붕괴하고 홍수처럼 밀려온 자본주의 덕분에 가능했던 상황이다.
목돈을 움켜쥔 카롤은 이제 건실한 사업가로 변신한다. 그가 부를 쌓는 방식은 동유럽과 제3세계에서 수급한 저렴한 상품을 서방에 수출하고, 동유럽에서 생소한 상품을 발 빠르게 유통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와 서유럽 중간에 자리한 폴란드의 위치를 적절히 활용해 시세차익으로 큰 이익을 낸다. 제조업이나 전통산업이 아니라 허생전에서처럼 정보와 매점을 통해 신흥 갑부가 줄줄이 등장한 동유럽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카롤은 한시도 잊은 적 없었던 도미니크와의 재회를 꿈꾼다. 그는 이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 하지만, 전처가 자신이 아니라 재물에만 마음을 쏟을까 두렵기만 하다. 고심 끝에 카롤은 터무니없는 시험을 도미니크에게 적용하기로 한다. 돈이면 다 되는 사회주의 붕괴 직후 동유럽이기에 가능한 작전을 수립한 그는 재결합을 완성하기 위해 특별한 단계를 설정해둔다. 그 단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저 연인의 사랑싸움으로만 간주한다면 감독의 진정한 의도와는 몇 광년은 될 정도로 동떨어진 해석으로 추락하고 말 테다.
거장의 설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