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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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람들은 을파소보다는 을두지를 더 많이 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태왕(대무신왕) 편을 읽어보면, 북한 사람들이 을두지를 많이 아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한나라를 계승한 후한이 건국(서기 25)된 뒤에 이 나라의 요동태수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했다. 대무신태왕은 우보(右輔) 송옥구와 좌보 을두지 등을 불러 대책을 강구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한국이나 한성의 한(韓)은 한(汗)이나 칸처럼 군주를 가리키는 칭호였다고 말한다. 한국어 발음 '한'에 맞는 한자를 찾다 보니 한(韓)을 선택하게 됐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한자의 원뜻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이렇게 처음에는 군주를 지칭했던 '한'이 나중에 국가를 지칭하게 됐다는 게 신채호의 설명이다.
신채호는 고조선에 신한·말한·불한이라는 세 군주가 있었다면서 그중 부왕(副王) 격인 말한·불한을 음역하면 마한·변한이 되고 의역하면 좌보·우보가 된다고 말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좌보와 우보인 을두지와 송옥구는 재상급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재상보다는 위상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침략군을 어떻게 막으면 좋겠느냐는 대무신태왕의 물음에 대해 우보 송옥구는 '험지를 근거로 기병(奇兵)을 활용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적이 함락하기 힘든 요새를 지키고 있다가 기습 공격으로 전세를 뒤집자고 건의한 것이다.
좌보 을두지는 신중한 접근법을 추천했다. 그는 작은 나라 군대가 큰 나라 군대와 정면으로 마주하면 패배하기 쉽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다가 적이 지쳐 돌아갈 때 공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대무신태왕은 좌보의 방책을 수용했다. 태왕은 지금의 지린성(길림성) 지안현(집안현)에 있는 위나암성에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성 밖 평야의 곡식을 치우고 들판을 불사르며 우물을 메워버린 뒤 성으로 들어가는 청야수성(淸野守城)을 택한 것이다.
이로부터 한나라 군대의 봉쇄가 계속됐다. <삼국사기>는 이 봉쇄가 '수십 일' 이어졌다고 말한다. 한나라 군대는 성을 외부와 단절시켜 고구려인들의 힘을 빼는 전술을 구사했다. 성 안의 고구려인들이 음식은 물론이고 식수도 제공받지 못하게 하는 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고구려 수뇌부는 한나라 군대가 지칠 때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시점은 오지 않았다. 태왕은 가만히 있다가는 아군이 먼저 지쳐 쓰러지겠다는 생각에 을두지에게 또다시 의견을 물었다.
을두지의 두 번째 계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