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개봉 예정 영화의 사전 시사회를 볼 기회가 거의 없다. 요즘엔 온라인 시사회라는 이름으로 관련 자료와 함께 비공개 링크를 제공하는 경우가 늘긴 했지만, 그래도 극장에서 관객 눈높이로 영화를 보고 소개할 기회는 여전히 수도권의 전유물에 가깝다.

그런데 이 영화는 '대가족 시사회' 기획으로 몇 지역을 순회하며 영화에 참여한 이들을 동네마다 방문하게 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덕분에 영화 개봉(9월 11일) 전 시사회 참석 기회를 얻었다. 극장으로 향하는데 귀를 찢는 소음이 들려왔다. 듣기 민망한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귀가 쏠렸다.

극장 앞 교차로 건너편에는 전직 대통령 이름을 딴 역전 광장 개명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고, 맞은편에선 대항 집회가 있었다. 요란한 욕설은 대항 집회를 주도한 극우 유튜버의 마이크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막말을 이어갔다. 소음에 정신이 빠진 채 극장에 도착해 영화를 봤다. 앞서 겪은 불편한 사건이 오히려 영화를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어줬다. 스트리밍으로 봤다면 얻을 수 없었을 감흥이다. 그만큼 영화 <장손>은 우리 사회의 어떤 본질과 직결되어 있었다.

두부 공장 김씨 집안의 제삿날

 영화 '장손' 스틸 이미지
영화 '장손' 스틸 이미지㈜인디스토리

경상도 시골,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일가 제삿날이다. 이날만큼은 타지에 있던 직계 가족 3대가 전부 모인다. 대를 이을 장손 '성진(강승호)' 역시 서울에서 소집에 응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를 반긴다. 다른 가족들이 섭섭해하건 말건 장손은 집안의 대들보이자 미래다. 무더운 여름에 임신한 채 땀 흘리며 전을 부치던 성진의 누나가 에어컨 좀 틀자고 사정해도 요지부동이던 할머니는 장손이 도착하자마자 냉큼 에어컨을 켠다.

식구들은 성진에게 그만이 감당할 과제를 부탁한다. 할아버지를 설득해 자정인 제사 시간을 좀 당기자는 것이다. 다들 다음날 출근도 해야 하고 처리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장손 부탁이라면 할아버지 태도도 누그러질 듯하다.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장손의 부탁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다들 신이 난다.

요란한 대가족 제사 풍경이 한참 이어진다. 조부모, 독자인 성진의 부모와 큰고모, 작은고모 부부, 누나 부부까지 모여 제사를 마치고 늦은 저녁 식사를 나눈다. 오랜만에 재회한 가족들은 화기애애해야 하지만, 그다지 분위기가 좋지 않다. 묵은 감정 탓에 종종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도래하지만, 그때마다 용케 수습한다. 갈 사람은 가고 장자 직계 가족들만 남자 이 일가의 사연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성진은 기왕 내려온 김에 좀 더 머물라는 조부모 만류에도 떠날 기회만 노렸다는 듯 집을 나온다. 그런 장손을 할아버지(우상전)와 할머니(손숙)가 멀리까지 전별한다. 다른 가족에겐 매몰차던 할아버지가 장손에겐 아낌없는 애정을 드러내도 성진은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계속 피해왔던 '장손' 책무를 자각하게 되고야 만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감긴 것처럼.

한국 사회 가족주의의 단면

 영화 '장손' 스틸 이미지
영화 '장손' 스틸 이미지㈜인디스토리

<장손>을 보면서 먼저 떠오른 건 다른 '레퍼런스' 고전 명작 영화가 아니라 염상섭의 소설 <삼대>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쌓아 올린 조씨 집안 3대의 풍경화와 이 영화 속 김씨 집안 3대의 군상은 시대 변화를 초월해 근현대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 갖는 무게를 묘사했다. 동시에 격동의 시대가 어떻게 이 혈연 공동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입증하는 축소판 모델이라는 동질감도 있다. 어쩌면 경성 한복판 부호가 해방 이후 영락해 경상도 산자락으로 이주해 가문의 역사를 이어간다면 나올법한 그런 이야기다.

<삼대>의 3대 주인공이라 할 '조의관'은 <장손>의 할아버지, '조상훈'은 성진의 아버지 '태근(오만석)', 그리고 '조병기'는 성진과 고스란히 대비되는 존재들이다. 한국전쟁에서 가족을 잃고 악착같이 살아남아 가문을 이어온 할아버지는 이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존재다. 그에겐 천신만고 끝에 건사한 두부 공장과 가문의 재산을 장손 성진에게 차질 없이 계승해 주는 게 생의 마지막 목표다. 그래서 늘 색시만 데려오면 나머진 '이 할배'가 다 책임진다며 대를 잇는 데에 집착한다.

그런 할아버지는 독자이자 성진의 아버지인 태근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쟁의 상처로 열렬한 반공주의자가 된 할아버지에게 태근은 대학 보내놨더니 빨간 물 들어서 방황하고, 두부 공장을 맡겼더니 마음에 들지 않게 운영하는 실패한 아들이다. <삼대>에서 조의관이 신식 교육까지 마치게 해줬더니 돈 쓸 줄만 아는 아들 상훈을 미덥지 않아 하던 것과 판박이다. 아버지의 불신이 뼈에 사무친 태근은 조상훈이 그랬던 것처럼 허풍만 쳐대며 꼼꼼하게 공장을 돌보지 않는다. 그래서 부자 사이의 불신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간다.

장남을 믿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장손 성진에게 모든 기대를 넘긴다. 하지만 성진은 배우를 하겠다며 서울에서 당최 내려오지도 않는다. 장손에게 조부모가 원하는 게 뭔지 알면서도 가업인 두부 공장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며 폭탄선언으로 찬물을 끼얹는다. 그러면서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격의 없이 어리광을 부리거나 소소하게 말동무가 되어준다. 가문의 군주 격인 할아버지의 가부장 권위를 전복하는 데 실패하고 안주한 아버지 세대와도 다른 길을 걸으려 하지만, 성진 역시 뚜렷하게 방향을 개척하거나 당당히 실적을 선보이진 못한 상태다. 하지만 자신이 한 발짝 떨어져 지켜봐 왔던 이 집안의 뿌리 깊은 분쟁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아 한다.

그야말로 '현대 가족' 이야기

 영화 '장손' 스틸 이미지
영화 '장손' 스틸 이미지㈜인디스토리

염상섭의 소설과 유사성을 언급했지만, 다른 시대와 변화된 세태를 기반으로 한 영화에는 고유한 지점과 독특한 변주 역시 두드러진다. 우선 김씨 집안의 여성들, 그리고 김씨 성 아닌 이들의 존재감이다. 성진의 할머니를 어떤 위치에 두느냐는 이 대가족 내부 역학을 해석하는 데 주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그리고 성진의 어머니 수희(안민영), 큰고모 혜숙(차미경)과 작은고모 옥자(정재은)가 보이는 대조적 행보, 여기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성진의 누나 '미화(김시은)'까지 이 가문의 여성들이 변화된 시대상에 맞춰 드러내는 각자의 지향을 관찰하는 건 흥미로운 지정학 요소다.

이 대가족에서 겉도는 이들이 있다. 할아버지는 핏줄에 집착한다. 그 때문에 아무리 집안에 헌신해도 김씨 성을 갖지 못한 이들은 영원히 '2등 가족'에 머물 수밖에 없다. 사위들이 집안에서 점유하는 위상과 그들의 엇갈린 행보 역시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되어준다. 여기에 추가로 그냥 지나치기 쉬운 두부 공장의 직원들이 있다. 김씨 가문의 명운을 이어주는 기반이자 할아버지에서 장남, 그리고 장손으로 대물림되는 가부장 권력의 원천인 이 공장 직원들 역시 대를 이어 봉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멸족의 위기를 겪었지만, 할아버지는 기어코 살아남아 가문의 유산을 승계할 수 있었고 마을 이웃의 직원들 또한 선대가 그랬던 것처럼 김씨 가문을 종가처럼 섬기며 지내왔을 테다. 그들이 지켜보는 영화 속 공장주 가족의 군상극은 어떤 풍경일지 상상하는 재미 역시 놓칠 수 없겠다.

하지만 결정적인 건 장손인 성진과 이후 세대다. 둘째 고모네 염색하고 배꼽티 입은 외사촌 여동생, 온갖 가문의 곡절 속에도 잘 출산한 어린 조카는 이제 덩굴처럼 엉킨 대가족의 굴레를 벗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도전의 주인공이 될 테다. 그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본인 역시 답을 찾고자 하는 구도의 길일 테다.

국문과 출신 감독이기에 가능한

 영화 '장손' 스틸 이미지
영화 '장손' 스틸 이미지㈜인디스토리

염상섭의 <삼대>를 곧바로 떠올렸지만, 중반부를 지나며 점점 이청준의 <축제>가 머릿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미 소설과 거의 동시에 임권택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가 나온 바 있는데, <장손>과 해당 작품이 묘사하는 구도는 조금 결이 다를지언정, 제사를 포함한 가족 제의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지 고찰을 드물게 제대로 조명한 작업이란 점에서 함께 묶을 만하다.

현장에서만 체감할 수 있는 발견도 있었다. 하필 대가족 시사회란 타이틀답게 상영관 내 관객 상당수가 평소 독립영화에선 찾아보기 힘든 중장년층으로 채워져 있다 보니, 영화 속 경조사 장면에서 다들 정숙한 관람보다는 본인들의 경험과 비교해 가며 품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더 1996년 임권택의 영화 속 풍경과 겹치는 구석이 많아 보였다. 이 역시 혼자 봤다면 얻을 수 없을 경험이었다.

<장손>은 풍부한 각도로 조명할 수 있는 호환성 탁월한 '그릇' 같은 작업이다. 자신의 세대에겐 낯설고 그저 거리를 두고픈 불편부당한 가족제도 유산을 오랜 세월 고심해가며 해석하려 한 노력이 장독대에 고인 묵은장처럼 숙성된 결과물이다. 추석 명절이 딱 맞는 개봉일이 맞다 싶다. 유쾌하게 온 가족이 야유회 겸 볼 작품은 아닐 수 있지만, 영화에 담긴 근현대 한국 가족주의 초상과 변주가 요즘 독립영화에서 그저 복고풍 향수 혹은 억압 기제로만 다뤄지는 것과는 몇 단계 차원이 다른 전망과 사려를 선보인 건 분명하다.

그래서 더더욱 영화 속 가족 3대의 시간을 현실의 가족 3대가 함께 보는 극장 속 풍경이 기다려진다. 아마 오랫동안 같은 지점을 따로 또 함께 응시하게 될 테다.

 영화 '장손' 포스터 이미지
영화 '장손' 포스터 이미지㈜인디스토리

<작품정보>

장손 House of the Seasons
2023 한국 웰메이드 가족시네마
2024.09.11. 개봉 121분 12세 관람가
감독/각본 오정민
PD 정조은, 장지원
출연 강승호(장손 성진 역), 우상전(할아버지 승필 역), 손숙(할머니 말녀 역),
차미경(큰고모 혜숙 역), 오만석(아버지 태근 역), 안민영(어머니 수희 역),
정재은(막내고모 옥자 역), 서현철(막내고모부 동우 역), 김시은(누나 미화 역),
강태우(매형 재호 역)
제작사 영화사 대명
제작 오정민, 장지원, 정조은
배급 ㈜인디스토리

2023 28회 부산국제영화제 KBS 독립영화상/오로라미디어상/CGK 촬영상
2023 4회 수려한합천영화제 수려한합천상
2023 49회 서울독립영화제 넥스트링크상
장손 오정민감독 강승호 우상전 오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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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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