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중년이 된 '제시(에단 호크)'는 아들 '헨리'와 여름휴가를 보내고 공항에서 아들을 미국으로 전송하려는 중이다. 아들이 좋아할 간식도 이것저것 주문하고, 노트북 충전은 잘했는지도 묻는다. 다정한 아빠로 보이지만 정작 제시는 헨리가 툭툭 던지는 짧은 답변에 어쩔 줄 모르며 곤혹스럽다. 부자 관계가 딱히 나쁘진 않다. 그저 서먹할 뿐이다. 제시는 헨리와의 이별을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보낸다.

아들이 비행기에 탄 뒤 제시는 공항에서 다시 다른 가족들이 기다리는 해변마을로 향한다. 그곳에는 '셀린(줄리 델피)'과 쌍둥이 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궁금해했을 비밀이 별다른 설명 없이 이 장면의 유려한 전환만으로 해소된다. 제시는 이미 전작 <비포 선셋>에서 사실상 별거 상태에 돌입했던 전 아내와 이혼하고 셀린과 결혼해 함께 살고 있던 것이다. 벌써 파리에서의 재회 이후 9년이 흘렀다. 아마 시리즈 전편을 정주행하고 3번째 연작을 만나는 이들이 절대다수일 테니 새삼 감회가 어릴 만하다.

18년간의 순애보가 마주한 결정적 위기

 비포 미드 나잇 스틸컷
비포 미드 나잇 스틸컷 에무필름즈

가족은 6주간의 여름휴가를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카르다말리 마을에서 보내는 중이다. 이제 달콤한 휴가도 끝나간다. 사실 딱 하루 남았다. 전 아내와 지내는 아들 헨리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오랜만에 아빠와 시간을 보내러 합류했다 막 헤어진 것이다.

제시는 이제 성공한 작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셀린은 여전히 환경운동에 매진 중이다. 쌍둥이 딸들은 그저 사랑스럽다. 휴가지에서도 제시는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로 인기인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에게해의 풍광 속에서 만족스러운 여름을 보냈고, 마지막 밤을 자신들이 묵고 있던 게스트 하우스 대신 근사한 호텔에서 오랜만에 부부만의 오붓한 시간으로 즐기려 한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멋진 여름이 아닌가.

마흔 줄에 들어선 제시와 셀린은 여전히 수다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종종 티격태격하긴 해도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예전과 확연히 다르다. 예전에는 철학과 세계에 대해, 불확실한 청춘의 미래에 대해, 성장 과정에서 동질감에 대해 공유하며 때로는 논쟁을 벌이긴 해도 그 과정에서 서로 이해하고 각자의 세계를 확장하는 계기로 삼곤 했었다. 하지만 첫 만남으로부터 18년, 재회하고 합친 후 9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서로를 너무 잘 알고, 각자의 차이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간파된 상태다. 그 차이가 이제 둘의 대화를 친밀하지만 맥 빠지게 이끈다.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꿈과 이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둘의 대화는 오로지 육아와 살림, 각자가 골몰하는 일에 대한 것들로 채워진다. 마치 업무 점검 시간의 문답처럼 그들의 대화는 반복과 확인만 거듭할 뿐이다. 셀린은 오래 매달렸던 재생에너지 프로젝트가 엎어지자, 이참에 정부 사업에 참여해 제대로 일을 치러볼까 고심 중이다. 제시는 새 책 영감을 수집하는 것도 일이지만, 이제 불과 4년 후면 성인이 되어 독립해야 할 아들과 더 자주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게 걱정거리다. 그런 일상적 고민을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둘 사이에서 배출되지 않고 쌓여만 간다. 그런 불만은 마침내 근사한 마지막 밤에 폭발하고 만다.

오랜 연인 이어간 배우와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리차드 링클레이터에무필름즈

우리는 이미 이 시리즈의 앞선 2편을 섭렵한 후 마침내 대미를 장식하는 '미드나잇'에 이르렀다. 23살 동갑내기 남녀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함께 기차에서 내려 하룻밤을 보냈다. 9년 후 둘은 프랑스 파리의 헌책방에서 자신들의 사연을 소재로 한 소설 출간을 계기로 재회한다. 다시 9년이 흘렀다. 그들은 그토록 원했던 결합에 성공하고 비로소 함께 살아간다. 모든 건 만사형통으로 이뤄진 셈이다. 제시와 셀린, 두 주인공이 풋풋하고 싱그럽던 청춘에서 어느덧 머리카락과 수염에 새치가 나고 뚱뚱하고 주름이 가득하다며 자조할 만큼 시간은 화살같이 흘러버린 것이다.

자연히 그들의 감정과 생각도 변할 수밖에 없다. 지금 현재의 그들은 고 신해철의 청춘 송가, '나에게 쓰는 편지' 속 가사처럼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두가 알다시피 감독은 의도적으로 영화 안과 밖의 현실을 통합하고자 같은 배우를 교체하지 않고 주인공으로 기용한 것은 물론, 정확히 영화 속 시간의 간격과 똑같이 나이를 먹도록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런 감독의 야심은 훗날 <보이후드>로 절정에 도달한다.) 후속작들에서 두 주연배우는 감독과 공동으로 각본을 작업할 정도로 평생의 친우가 된다. 영화는 가상의 드라마이지만, 감독의 심모원려 덕분에 최대한 바깥 현실의 드라마와 유사하게 구성된 셈이다.

감독과 두 주인공의 우정이 쌓인 건 당연한 결과이지만, 추가되는 관계자는 훨씬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당연히 익숙한 지인들의 18년 동안 사연 가득한 연애담을 바로 곁에서 훈수 둬가며 구경하듯 영화를 보게 된다. 그저 극장 문 나서면 재미있다, 아니다로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함께 숨을 죽이고 긴장하며 때로는 이마를 탁하고 치고, 간혹 박장대소하며 둘의 장구한 인연이 과연 어떻게 대미를 장식할지 응시하게 된다. 이것은 영화를 둘러싼 '우정'이라 해도 좋을 법하다. 이런 사례는 흔할 리 없다.

그렇게 오래 인연을 이어온 관객은 시리즈 마지막, 밤이 깊어가는 가운데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알 거 다 아는 제시와 셀린이 그동안은 보여주지 않던 격렬한 언쟁과 함께 그들의 사랑이 식었다는 선언에 당황해할 테다. 어쩌면 오늘 밤 그들의 기나긴 사랑이 끝나버릴지 모른다. 물론 그들이 다시는 얼굴 안 보고 살진 않겠지만, 둘의 사이는 처음 그들이 만나게 된 18년 전 유로스타 열차 안, 거세게 다투던 독일인 중년 부부처럼 남과 다를 바 없이 형식적인 관계로 머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그럴지 모를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이제 제시와 셀린은 구름 위의 산책을 더는 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거나 불륜으로 파경에 이를 지경은 물론 아니다. 서로 그 정도의 신뢰는 지녔다. 하지만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쟁점은 둘이 처음 빈의 거리에서 치열하게 논쟁하던 보편적 쟁점과 직결된다. 무식한 양키와 신경질적 페미니스트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파열음은 이들이 만나는 내내 해소되지 않았다. 인류가 이 문제를 풀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제시와 셀린이 만나고 헤어지고 재결합하는 동안 소련이 무너지고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세계가 동시에 접속되지만 여전히 근본저긴 문제는 제대로 해결된 게 없다. 둘은 그런 상황을 상징할 뿐이다.

그렇게 둘은 죽어라 싸운다. 물론 파국으로 향하는 게 그들의 본의는 아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다퉈왔기에 지금 그들의 싸움 이유가 해소되지 않으리란 것 또한 빤히 보인다. 퇴로가 필요한데 각자의 자존심과 쌓인 감정의 찌꺼기가 이를 가로막는다. 게다가 지성이 넘치는 둘은 그저 개인감정이 아니라 각자가 견지하는 신념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쉽게 물러설 순 없는 노릇이다. 격렬한 논쟁을 바라보며 둘의 파경을 염려하는 마음 절반, 그들이 일진일퇴하며 양보하지 않는 첨예한 현대사회의 쟁점을 구경하는 재미 절반이 관객의 솔직한 심정인 건 덤이다.

우리 세계의 영원한 논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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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미드 나잇 스틸컷 에무필름즈

제시와 셀린의 이 치열한 러브스토리는 그저 세상과 고립된 채 둘만의 행복 혹은 종말로 귀결되지 않는다. 애초 그렇게 설계되지도 않았다. 이들은 1994년 빈에서 처음 만날 때부터, 2003년 파리에서 재회하는 순간에도, 2012년 에게해 바닷가에서도 몸은 둘이라도 마음은 하나 따위 뻔한 거짓말을 믿지 않는다. 영혼의 단짝은 맞을지라도 제시와 셀린은 엄연히 독립된 자아를 가진 둘이다. 23살 적과 32살 적의 운신이 수월했던 과거와 41살 되니 이것저것 챙기고 눈치를 봐야 할 게 산적한 현재의 변화가 그런 명확한 설정에 대처하는 것을 차이가 확연하게 만들 따름이다.

이제 '어른'이 된 이들은 혼자 몸이 아니다. 자신들이 낳은 자녀를 책임지고 양육해야 하고, 젊은 시절에 꿈꾸던 세상과 자신의 분신인 작품에 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운신의 폭은 더없이 비좁지만 꿈은 포기할 수 없다. 둘이 함께 응시하는 석양이 저물어가는 풍경은 그들의 조급해진 심리를 상징하는 셈이다. 나이를 먹으면 현명해지는 게 아니라 참을성이 없어진다는 자조처럼 그들 역시 이제 둘이 처음 만나던 시절 가졌던 꿈과 이상을 포기하고 기성세대처럼 되는 게 두렵다. 이렇게 살다가는 그렇게 굳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망설임이 초조함으로 바뀐다. 그래서 둘이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신랄하게 조소를 퍼붓다가 다시 휴전을 거듭하는 게 우습지만은 않다. 오히려 어느 틈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미국과 유럽을 상징하는 제시와 셀린은 그들이 공유하는 서양 문명의 요람, 그리스 해변에서 수천 년 동안 되풀이된 인생과 문명에 대한 논쟁 속에서 둘의 관계를 확인하는 그들만의 '천일야화'에 돌입하고 오랜 전투를 마무리한다. 그렇게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한다. 물론 둘은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이후로도 수시로 다투고 화해하길 거듭할 것이다. 하지만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듯 그리스와 비잔틴 문명의 땅에서 치열하게 겨뤘던 대전의 교훈은 헛되지만 않을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억지로 없애려는 무익한 시도 대신 친밀한 적수 & 영혼의 단짝이라는 영구운동 과제를 풀어가며 둘은 함께 나이를 먹어갈 테다. 3부작은 웬만하면 무리하게 늘이지 않는 게 좋다는 예시가 차고 넘치지만, 이들이 호호 할머니와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툭탁거리는 속편이 문득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다. 오랜 친구들을 떠나보내기에 섭섭해서 그런가 보다.

<작품정보>

비포 미드나잇 Before Midnight
2013 미국 드라마, 멜로, 로맨스
2024.09.04. (재)개봉 108분 청소년 관람불가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각본 리차드 링클레이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출연 에단 호크(제시 역), 줄리 델피(셀린 역)
수입 (주)빅웨이브시네마
배급 에무필름즈

"비포 미드나잇"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비포 미드나잇" 포스터영화 포스터 이미지에무필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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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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