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링클레이터
에무필름즈
우리는 이미 이 시리즈의 앞선 2편을 섭렵한 후 마침내 대미를 장식하는 '미드나잇'에 이르렀다. 23살 동갑내기 남녀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함께 기차에서 내려 하룻밤을 보냈다. 9년 후 둘은 프랑스 파리의 헌책방에서 자신들의 사연을 소재로 한 소설 출간을 계기로 재회한다. 다시 9년이 흘렀다. 그들은 그토록 원했던 결합에 성공하고 비로소 함께 살아간다. 모든 건 만사형통으로 이뤄진 셈이다. 제시와 셀린, 두 주인공이 풋풋하고 싱그럽던 청춘에서 어느덧 머리카락과 수염에 새치가 나고 뚱뚱하고 주름이 가득하다며 자조할 만큼 시간은 화살같이 흘러버린 것이다.
자연히 그들의 감정과 생각도 변할 수밖에 없다. 지금 현재의 그들은 고 신해철의 청춘 송가, '나에게 쓰는 편지' 속 가사처럼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두가 알다시피 감독은 의도적으로 영화 안과 밖의 현실을 통합하고자 같은 배우를 교체하지 않고 주인공으로 기용한 것은 물론, 정확히 영화 속 시간의 간격과 똑같이 나이를 먹도록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런 감독의 야심은 훗날 <보이후드>로 절정에 도달한다.) 후속작들에서 두 주연배우는 감독과 공동으로 각본을 작업할 정도로 평생의 친우가 된다. 영화는 가상의 드라마이지만, 감독의 심모원려 덕분에 최대한 바깥 현실의 드라마와 유사하게 구성된 셈이다.
감독과 두 주인공의 우정이 쌓인 건 당연한 결과이지만, 추가되는 관계자는 훨씬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당연히 익숙한 지인들의 18년 동안 사연 가득한 연애담을 바로 곁에서 훈수 둬가며 구경하듯 영화를 보게 된다. 그저 극장 문 나서면 재미있다, 아니다로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함께 숨을 죽이고 긴장하며 때로는 이마를 탁하고 치고, 간혹 박장대소하며 둘의 장구한 인연이 과연 어떻게 대미를 장식할지 응시하게 된다. 이것은 영화를 둘러싼 '우정'이라 해도 좋을 법하다. 이런 사례는 흔할 리 없다.
그렇게 오래 인연을 이어온 관객은 시리즈 마지막, 밤이 깊어가는 가운데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알 거 다 아는 제시와 셀린이 그동안은 보여주지 않던 격렬한 언쟁과 함께 그들의 사랑이 식었다는 선언에 당황해할 테다. 어쩌면 오늘 밤 그들의 기나긴 사랑이 끝나버릴지 모른다. 물론 그들이 다시는 얼굴 안 보고 살진 않겠지만, 둘의 사이는 처음 그들이 만나게 된 18년 전 유로스타 열차 안, 거세게 다투던 독일인 중년 부부처럼 남과 다를 바 없이 형식적인 관계로 머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그럴지 모를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이제 제시와 셀린은 구름 위의 산책을 더는 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거나 불륜으로 파경에 이를 지경은 물론 아니다. 서로 그 정도의 신뢰는 지녔다. 하지만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쟁점은 둘이 처음 빈의 거리에서 치열하게 논쟁하던 보편적 쟁점과 직결된다. 무식한 양키와 신경질적 페미니스트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파열음은 이들이 만나는 내내 해소되지 않았다. 인류가 이 문제를 풀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제시와 셀린이 만나고 헤어지고 재결합하는 동안 소련이 무너지고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세계가 동시에 접속되지만 여전히 근본저긴 문제는 제대로 해결된 게 없다. 둘은 그런 상황을 상징할 뿐이다.
그렇게 둘은 죽어라 싸운다. 물론 파국으로 향하는 게 그들의 본의는 아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다퉈왔기에 지금 그들의 싸움 이유가 해소되지 않으리란 것 또한 빤히 보인다. 퇴로가 필요한데 각자의 자존심과 쌓인 감정의 찌꺼기가 이를 가로막는다. 게다가 지성이 넘치는 둘은 그저 개인감정이 아니라 각자가 견지하는 신념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쉽게 물러설 순 없는 노릇이다. 격렬한 논쟁을 바라보며 둘의 파경을 염려하는 마음 절반, 그들이 일진일퇴하며 양보하지 않는 첨예한 현대사회의 쟁점을 구경하는 재미 절반이 관객의 솔직한 심정인 건 덤이다.
우리 세계의 영원한 논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