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찬란
영화는 그렇게 엄마의 입장에서 어쩌면 나의 미래가 될 어르신의 몰락,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불안정한 노동과 사랑을 동시에 껴안은 딸의 수난을 동시에 경험하며 변화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여러 사건이 발생하지만, 그런 일련의 굵직한 사건들이 극적으로 긴장감을 불러오기보다는 내 머릿속에서 두 단계쯤 걸러진 다음 생각으로 정리되듯 표현된다.
이 때문에 긴장감 넘치는 서술을 기대한 이들이라면 실망할 수 있지만, '영상소설'을 감상하듯 문장과 풍경을 조화해가면서 관람하는 이들에겐 곱씹을 여유를 선사하며 흘러가는 전개 방식이 인상 깊게 남을 테다.
나는 시종일관 '엄마'로 표기되지만, 반대로 딸과 딸의 연인은 본명이 아니라 자신들끼리 정한 애칭으로 서로 호명한다. 심지어 나에게도 그렇게 불러주기를 요청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 대신에 애인과의 암호처럼 붙인 별명이라니. 엄마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다.
실제로 나는 이에 승복하는 기색은 드러내지 않지만, 딸의 애인과 굳이 이 문제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지도 않게 된다. 경험하지 않는 것을 기성세대가 된 지 오래인 '나'가 수용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굳이 내가 애 엄마라는 영역 분쟁을 벌일 생각도 없으니 자기들끼리 부르는 걸 일일이 타박하진 않으련다. 이 정도가 현실적인 우리 시대 엄마들의 '선'일 것이다.
딸과 딸의 애인은 처음에는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엄마들 마음이란 게 대단한 걸 바라지도 않는데, 어째 저들은 청개구리 짓만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내가 바라던 평범한 역할과 소소한 삶의 행복은 그들의 관계로도 가능하더라는 체험을 더불어 겪으면서 생각은 조금씩 변해간다. 엄마의 '해방일지'처럼, 그저 평범하고 다만 조금 더 연민이 많았을 뿐이던 주인공이 변모해가는 과정은 극적 각성이 아니라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점진적으로 진전된다.
그런 느리지만 확실한 변화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겉으로는 아주 소소한 변화만 확인될 뿐이다. 그러나 '나'의 삶은 분명히 달라졌다. 나와 딸까지 내가 모시다 병원과 재단이 헌신짝처럼 버린 어르신의 전철을 밟지 않을지 공포에 떨던 대신, <이갈리아의 딸들>이나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상상하던 모계 공동체 혹은 현대판 아마조네스 같은 형태를 경험하게 됐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아닌, 실제로 '정상 가족'이란 틀에만 갇히지 않는 (대안) 가족이 가능하다는 일상의 체험은 무엇보다 힘이 세다. 정상 가족이라 해도 3대가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기 힘든 현대 한국 사회에서 나는 여성들의 힘과 노력으로 그게 구현 가능하다는 걸 목격한 것이다. 남의 일 불구경하다 나에게 닥친 상황에 방황하던 주인공이 다시 낯선 타인에게 연대의 시선을 돌리는 집중과 확장의 시야 처리가 기승전결과 자연스럽게 연동한다.
영화는 화끈하고 후련한 전개 대신에 유유히 흘러가는 변화의 도상에서 파생되는 세밀한 조각들을 포착하고자 한다. 주인공들은 정상 가족이라 강요되는 형태 너머에 다른 가족이 가능함을 구현하지만, 그 대안적인 모델은 절대로 그들만의 '게토'가 아니다. 그리고 여성들의 노동이 일반적으로 겪는 주변부의 소외 역시 충실하게 구현해 본 작품의 사려 깊은 태도를 증명한다.
2층의 다둥이 젊은 부부는 중반까지는 엄마로서 딸의 소꿉장난 같은 기행(?)을 근심하던 입장에선 서로 배치되는 것처럼 그려졌지만, 충돌이나 배척 없이 그저 섞여서 어울려 살면 되는 이웃으로 어느 틈에 섞여든다. 선글라스 끼고 조금 낯선 존재들을 벽으로 차단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가능한 변화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