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6일 당시 잉글랜드 남자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내던 스벤 예란 에릭손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스웨덴 출신의 축구계 명장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이 별세했다.
영국 BBC 등 해외 주요 언론들은 에릭손 감독이 지난 26일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에릭손 감독은 지난 1월 췌장암 말기 진단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바 있다. 올해 초 자신의 축구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방송에 출연해 "남은 인생이 1년 정도인 것 같다"고 밝힌 그는, 결국 2024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에릭손은 선수로서는 주로 하부리그에서 수비수로 평범한 현역 시절을 보내다가 불과 27세의 나이에 일찍 은퇴했다. 지도자로서 훨씬 더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이후 곧바로 모국인 스웨덴의 데게르포르스 IF에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에릭손은 코치를 거쳐 1977년 29세의 나이에 감독으로 데뷔한다.
에릭손 감독은 1982년 스웨덴 빅클럽 IFK 예테보리를 UEFA컵(현 유럽축구연맹 유로파리그) 우승으로 이끌면서 국제축구계에 명성을 닐리기 시작한다. 이후 포르투갈 프리메라리가의 벤피카, 이탈리아 세리에 AS로마, 피오렌티나, 삼프도리아 등의 지휘봉을 잡았고, 1980-1990년대엔 가는 팀마다 리그와 컵대회 등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전성기를 보냈다.
특히 라치오를 이끌던 1999-2000시즌 세리에A 최종 라운드에서 당시 이탈리아 최강을 호령하던 유벤투스를 따돌리며 극적인 뒤집기로 우승을 일궈낸 장면은 커리어의 정점으로 꼽힌다. 라치오는 당시 세리에A에서는 중상위권 팀 정도에 불과했고, 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은 무려 24년만이었다. 에릭손은 그해 세리에A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며 세계적인 명장으로 인정받았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역사를 새로 쓰다
세계 축구 팬들에게 에릭손 감독의 이름이 가장 많이 회자되던 시기는 아마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감독 시절일 것이다. 당시 성적부진으로 극심한 암흑기를 보내고 있던 잉글랜드는 자국 지도자 케빈 키건을 과감하게 경질하고 그를 영입했다.
에릭손 감독의 등장은 여러모로 큰 화제가 됐다. '축구종가'를 자부하던 잉글랜드가 외국인 감독을 선임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리그 위상에서는 비교도 안 되는 스웨덴 출신이라는 점에서, 자존심이 남다른 잉글랜드 축구계에 더 큰 충격을 안겼다. 이전까지 클럽팀만 맡아왔던 에릭손 감독 역시 국가대표팀을 지도하게 된 것은 잉글랜드가 처음이었다.
그는 이방인 감독을 바라보는 영국 축구계와 언론의 텃세 속에서도 무려 6년간 장기집권하며 팀의 재건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록 우승같은 화려한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꾸준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데이비드 베컴, 웨인 루니, 마이클 오언 등 '황금세대'로 불리는 호화멤버들을 보유했으나 개성 강한 슈퍼스타들의 자존심 때문에 한 팀으로 화합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는 2002 한일월드컵, 유로 2004, 2006 독일월드컵까지 잉글랜드를 메이저대회 3회 연속 8강진출로 이끌었다. 2001년 9월에는 숙적으로 꼽히는 독일을 뮌헨 원정에서 5-1로 대파해 영국 축구 팬들의 자존심을 드높였다.
물론 일각에서는 잉글랜드의 높은 이름값에 비해 우승은커녕 4강도 한번 가지 못했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결과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또한 베컴같은 일부 선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토너먼트에서 무기력했다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다만 에릭손 감독 시절의 잉글랜드는 항상 조별리그부터 '죽음의 조'에 배정되거나, 토너먼트에서도 우승 후보들을 일찍 만나는가하면, 승부차기에서만 두 번 연속 탈락하는 등 유난히 운이 따르지 않았다.
정작 잉글랜드는 그가 퇴임하고 난 이후로 2024년 현재까지도 메이저대회 우승을 추가하지 못했다. 또한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이 부임하기 전인 2016년 이전까지는 유로 2008 예선탈락, 2010-2014 월드컵 2회 연속 조별리그 탈락 등의 굴욕을 거듭하며 뒤늦게 에릭손 감독의 역량이 재평가를 받기도 했다.
"스벤은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