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뉴 뮤턴트> 포스터
이십세기스튜디오
'다른 인간'에 대한 공포, 여기는 없어요
<뉴 뮤턴트>가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호러와 나 사이를 가로막던 마음의 벽이 왜 높아졌는지 설명하는 게 맞아 보인다.
호러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는 장르이다. 그렇기에 호러 영화의 '악역'은 평균적인 관객의 모습과 지나치게 다른 인물이다. 공감 가능한 사연을 가진 살인마 대신 '사이코패스' 캐릭터를 내세우고, 귀신을 비롯한 초자연적 현상을 가져온다.
하지만 이러한 호러의 특성은 귀신을 넘어서, 타자에 대한 혐오를 원동력으로 삼아 온다는 비판도 받아 왔다. 일례로 우주적 공포를 다룬 '코즈믹 호러'의 대표적 저자인 H.P. 러브크래프트는 당대 기준으로도 엄청난 인종주의자였는데, 그의 작품을 보면 '사악한 마술'을 부리는, '인간이 아닌' 비백인 인종에 대한 극심한 공포심이 눈에 띄게 자주 등장한다. 타 인종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이 그들을 '무서운'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꼭 인종주의가 아니더라도, 최근의 호러 영화 역시 '다른 신체'에 대한 두려움을 부각한 것은 마찬가지다. 2019년 영화 <닥터 슬립>은 욕조에서 나오는 '노인 여성의 나신'을 그 자체로 공포 요소로 사용했고,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영화가 '화상을 입은 몸'이나 '뒤틀린 신체'를 공포의 대상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뉴 뮤턴트>는 다름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다름을 탄압하는 사회'가 오히려 무서운 존재라는 점을 부각한다. 주인공 대니를 비롯한 아이들은 전부 선천적으로 어떠한 능력을 타고난 '돌연변이'들이다. 돌연변이 능력을 통해 누군가를 다치게 한 경험이 있던 아이들은 시설에 감금되어 불필요한 교정 치료를 받게 되고, 자신의 능력을 억제하는 법을 계속해서 배운다. 하지만 소리소문없이 나타난 괴생명체가 그들을 위협하자 아이들은 능력을 이용해 맞서 싸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뜬금없어 보였던 괴생명체의 정체가 '아이들 내면의 트라우마가 구현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엑스맨' 시리즈가 돌연변이를 통해 성소수자·장애인 등 현실 세계에서 소외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왔던 것을 감안하면, <뉴 뮤턴트>의 이러한 설정 역시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뉴 뮤턴트>는 그동안의 호러 영화에서 가해자 취급을 받아 오던 '다른' 존재들의 지위를 회복시킨다. '괴물'이라 일컬어지던 그들은 단지 오해받고 따돌림당해 왔던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갑툭튀'에 의존하지 않은, 뚜렷한 영화사적 계보
하지만 주제 의식 외에도, <뉴 뮤턴트>가 나를 끌어들인 방법은 다양했다. 약간의 고조된 긴장감 속에서 무언가가 '확' 튀어나와 관객들을 겁먹게 만드는, 소위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의 준말)' 장면은 여러 호러 영화에서 남용되어 왔다. 그 방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완성도가 부족한 작품들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과도하게 사용하다 보니 오히려 식상해진 면이 있다.
<뉴 뮤턴트>는 그러한 장치에 의존하는 대신, 타 영화에 대한 첨예한 오마주로 관객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1999년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에 대한 헌사로 가득한데, 일례로 안야 테일러 조이가 연기한 본작의 '일리야나'와 <처음 만나는 자유>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연기한 '리사'는 금발의 반항적인 리더라는 점에서 완전히 동일한 인물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