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납작 엎드릴게요> 스틸 이미지
㈜마노엔터테인먼트
곧이어 두 번째 장 '번뇌의 시그널'부터 '혜인'은 실존 위기에 본격적으로 시달린다. 군대라면 시간이 느리게 갈지언정 국방부 규정에 따라 때가 되면 제꺽 진급도 하고 처지가 향상될 희망이라도 품겠지만, 대리와 팀장이 버티고 있는 출판사 내에서 윗선이 나가거나 하지 않으면 혜인은 만년 막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겉으로는 상대적으로 일이 수월해 보이는 편이라 추가 인원 배정도 기대하기 어렵다. 마치 억겁의 반복이 형벌처럼 느껴질 유형지의 시간이다.
작은 사건이 터지고 어찌 해결하거나 봉합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혜인과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가 하나씩 정립돼 관객에게 각인된다. '달마가 내게 온 까닭'은 그런 롤러코스터 같은 상황 속에서 주인공이 그저 좌절과 절망만으로 치부하지 않고, 씩 웃어넘기거나 그래도 '최악'은 아니라며 긍정하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느낌의 장이다.
그만이 아는 전화위복의 사건을 그리면서 요즘 한국독립영화의 젊은 주인공으로선 드물게 스스로 내 탓임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지만 그들의 권능으로 '데우스 마키나'가 일어나진 않는다. 오히려 혜인의 마음속 의식의 흐름을 극적으로 표현하는데 가까운 사용법이다.
알고 보니 다른 직장 선배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거나 혹은 플랜B를 준비하고 있었다. 혜인은 그런 선배들을 보며 역시 '짬밥'은 무시할 수 없구나 깨닫는다. 그리고 이곳에서 평생 직장장으로 눌러앉을 게 아니라면 자신이 원래 꿈꾸던 일을 위한 준비과정을 어려운 현실이지만 조금씩 진행하고자 다짐한다.
하지만 한국의 평균적인 말단 직장인에게 제2의 인생을 위한 포석을 준비하는 건 꿈에 불과한 일이다. 혜인은 카페에서 하루 10줄만 글쓰기에 도전하자며 포부를 내비치지만, 늘 가게 마감이 될 때까지 졸다가 겨우 일어나기 일쑤다. 그래도 희망은 포기할 수 없다. '온종일 일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분'으로 그는 터벅터벅 밤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렇게 어찌어찌 지탱하던 직장생활에서 (영화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한) 조금 더 큰 사건이 결국 터지고 만다. 마지막 장의 제목은 영화 전체와 같은 '더 납작 엎드릴게요'다. 작은 출판사를 넘어 한국의 대부분 직장인이 마주치는 현실의 지독한 풍자다. 그 결말에 감정을 이입하지 않을 이가 과연 이 영화를 보게 될 이들 중 몇이나 될까?
조금 낯선, 하지만 그리 특별하지 않은 직장 잔혹사
<더 납작 엎드릴게요>는 원작을 집필한 헤이송 작가의 자전적 경험담을 바탕으로 삼는다. 작가는 29살, 본격적인 첫 직장으로 작은 사찰 부속 출판사에 입사해 6년째 되던 해에 퇴사했다. 영화는 그 이후의 삶이 그려진 원작 도서와는 달리 출판사에서의 사회초년생 시절에 집중하는 구성을 택한다.
아마 관객에게 가장 흥미로운 초반부 장면은 우리에겐 그저 스님들이 조용하게 수양하는 풍경으로만 인식되던 사찰 안의 수많은 직원, 즉 노동자들의 존재일 테다. 법당 행사에서 그런 노동자들의 실체가 규명된다.
신도들을 상대하는 가장 큰 행사라 할 여러 '재'들을 담당하는 '재팀', 행정실무를 총괄하는 '종무소', 재정업무를 관장하는 '회계팀', 그리고 사찰 관련 회지 업무를 주관하는 '출판사' 직원들이 모두 모인다. 대규모 종단에서 왜 '종무원장'이란 직책이 실세로 분류되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물론 주인공이 속한 사찰은 그리 큰 곳이 아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형 사찰은 그야말로 중견기업 정도 견적은 나오겠구나 상상하게 만들 대목이다.
물론 요즘엔 여러 부대사업이 더 늘어나는 추세이니 이 영화 속 직원들은 그저 최소 규모 소개에 그칠 테다. 사찰음식이 인기를 끌면 공양간은 대규모 식당으로 확장될 테고, 템플스테이가 각광을 받으니 숙박업 분야도 커졌을 법하다. 그렇게 세속적 영역이 커지면 속세의 잡음도 따라서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티격태격 불화는 굳이 이 영화가 아니라도 미디어에서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대목이다.
그렇게 조용하게 수양과 정진만 가득할 것 같은 사찰에는 속세의 오욕이 연일 침투하는 중이다. 그런 격랑 속에서 주인공과 출판사 동료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극락과 지옥을 오가며 '사찰 라이프'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