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어느새 세계에서 가장 결혼하기 힘든 나라가 돼 버렸다. 정부와 미디어에선 툭하면 세계 최악의 저출산 국가라면서 '이러다 조국과 민족이 0000년이 되면 소멸할 위기'라 개탄하지만, 정작 미래세대를 위한 실질적인 지원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온라인 커뮤니티 여기저기에선 세대 간, 성별 갈등을 조장하는 믿거나 말거나 사례들이 가득하다. 대충 요약하면 한국에서 결혼 한 번 하려면 온갖 정체불명의 조건을 상호 맞춰야만 한다. 게다가 결혼은 둘만의 절차가 아니다. 양가 부모와 일가친척, 친구들 눈치까지 봐가며 금지옥엽 키운 남의 자식 고생시키지 않을 준비를 완료해야 한다. 얼핏 보면 마치 아이돌 그룹 결성을 위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방불케 하는 난이도다.
정부와 사회 시스템이 요구하는 대로 분위기 몰아가던 시대는 이미 한참 지난 지 오래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결혼관에서 민주화와 함께 가정 내에 평등 부부 담론이 등장하면서 변화된 세태에 따라 맞벌이와 가사노동 분담은 상식이 돼 갔지만, 그런 긍정적 변화보다는 앞서 언급한 '급'에 맞는 물질적 조건 맞추는 게 더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당연시돼 온 가족 형성과 사회적 재생산 구조가 낯선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대안적 미래보다는 과연 결혼이란 방식이 앞으로도 유효할 것인지를 두고 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2002년 개봉했던 유하 감독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지금 돌이켜보면 엄청나게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당연히 해야만 할 것만 같던 시절이 저물고, 독립적 개인이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연애와 결혼 사이의 경계에 관한 고찰이 담긴 작품이어서다. 성적 쾌락이나 불륜을 향한 어두운 인식이 여전하던 시대 분위기와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인식 변화 또한 확인해볼 수 있다.
요즘 세대에겐 결혼은 하면 좋지만 조건 갖추기에 질려서 손사래를 치는 행위이거나, 혹은 본인과 상대를 함께 구속해버리는 족쇄처럼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당연히 과거처럼 부모세대의 말발이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비혼' 열풍은 한동안 지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비혼을 택하면 사회는 어떻게 지속 가능한지, 그리고 결혼을 하고 싶은 이들, 예를 들어 통상적인 남녀 간의 결혼 외에도 동성혼이나 시민결합 제도 같은 다양한 형태의 모색과 정착 시도 역시 간과될 순 없는 쟁점이다.
이런 가운데 일본 영화 특유의 코믹함과 신파가 어우러진 평작으로 간주하기 안성맞춤인 <내 아내가 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현재 결혼제도가 봉착한 상황을 꽤 흥미롭게 고찰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남편 험담 올리는 아내 vs. 아내 게시글 눈팅하는 남편
생필품 마트 부점장인 '유지로'(카토리 싱고)와 앱 서비스 온라인 고객상담센터 직원 '히요리'(키시이 유키노)는 결혼 4년째 맞벌이 부부다. 둘은 다른 식구 없이 반려 부엉이 '찰리'와 함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부부는 유지로가 일하던 마트에서 벽에 못을 박거나 흠집을 내지 않고 물건을 부착할 수 있는 '버팀이'를 구입하러 온 히요리에게 유지로가 맞춤형 상품을 소개하면서 처음 만났다. 구직활동 중 지친 히요리와 퇴근한 유지로는 우연히 식당에서 재회하고 둘은 곧 연인이 된다. 그리고 자식은 없지만 알콩달콩 부부생활을 누려왔다.
외관상 평온하던 결혼 생활에는 감춰진 비밀이 있었다. 유지로는 요즘 유행한다는 '남편 데스노트'라는 커뮤니티 게시판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 온라인 공간은 아내들이 남편을 흉보고 험담하는 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처음엔 그저 흥밋거리로 들여다보던 유지로는 '남편 데스노트' 중에도 '네임드'로 손꼽히는 닉네임 '찰리'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 부부가 일상에서 나누던 대화가 고스란히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지로는 아내 히요리가 매일 업데이트하는 자신을 향한 저주와 불신에 경악한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히요리는 여전히 유지로를 험담하며 인기를 끈다. 이제 유지로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는 '남편 데스노트'를 틈만 나면 탐독하며 아내의 이중생활을 '눈팅'하기 시작한다. 부부 사이엔 보이지 않는 강이 흐르듯 골이 깊어간다.
'네임드'로 이름을 알리던 히요리는 커뮤니티 내 다른 '네임드' 작성자들과 함께 게시된 글들을 모아 출판하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히요리는 출판 담당자의 주선으로 '남편 데스노트' 인기 필자들을 만나고 출판 계약을 맺는다.
한편, 유지로의 직장 후배직원은 성실하고 자상한 유지로에게 호감이 가는지 자꾸만 접근하기 시작한다.
출판하는 게 맞는지 고민하고 있던 히요리는 우연히 남편의 불륜으로 의심되는 현장을 확인하고, 유지로는 감정싸움을 벌이던 중 자신이 '남편 데스노트'와 닉네임 '찰리'를 알고 있음을 폭로한다. 단란하던 부부의 결혼 생활은 유지하기 힘든 위기에 봉착한다.
그녀는 왜 대나무숲을 찾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