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클럽"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엠엔엠인터내셔널㈜
<태풍 클럽>은 활자로 설명하기 힘든 영화다. 억지로 풀어내자면 악천후로 고립된 덕분에 어른과 사회의 속박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난 10대 청소년들의 기묘한 '해방구'가 형성되었다 소멸하는 설정이다. 굳이 압축하면 1박2일에 불과한 짧은 시공간의 은밀한 기억이다. 이것을 고스란히 푹 떠내어 보존한 것만 같은 그런 이야기다. 이걸 어떻게 3자가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연유로 영화를 '체험'해야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다.
영화 속에 담긴 시기는 1980년대의 일본이다. 고도성장으로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명확하고, 한창 번영을 구가하는 대도시를 동경하면서도 마땅히 꿈을 이룰 방도는 찾지 못하는 아이들의 불만이 팽배한 나가노 현 시골이다. 아이들은 숟가락을 노려보며 소원과 욕구를 표출한다. 무슨 주술이라도 하는 걸까? 옆 나라인 한국에서도 동시대 화제가 되었던, 숟가락 구부리는 초능력자 유리 겔라 열풍이 일본에서 대단했던 것의 반영이다.
조금만 비판적으로 따져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도 물질적 풍요로는 채워지지 않던 공허함을 느끼던 사람들은 앞다퉈 그렇게 흥미 위주로 잔뜩 부풀려놓은 미디어에 자발적으로 빠져들던 시절이다. 리에는 그런 도쿄를 동경해 등교하다 말고 무작정 대도시로 향하지만, 그곳의 외적 풍요와 그 이면의 차가움은 낯선 외계와 다름없다. 좋아하지만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절친 쿄이치 군은 공부를 잘하고 집도 유복하니 도쿄로 고교 진학을 할 테지만, 자신은 이 시골에서 뻔한 인생을 살 것이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리에를 감싸고 있다.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우고 성적 일탈에 호기심을 보인다. 따지고 보면 그 시절엔 너도나도 그랬다. 다만 금기시하며 은밀하게 취급했을 뿐이다. 40년 전에 완성된 이 영화는 그런 동병상련의 비밀 공감대를 수면 위로 태풍의 기운처럼 뿜어내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고립된 교정에서 그들만의 축제가 시작되자 그 기세는 통제할 수 없이 폭주하게 될 수밖에 없다. 동시대 한국의 청춘 세대는 군사독재와 그에 통제되는 억압적 사회 분위기 탓에 절대 불가능했던 면모다. 1968년을 전후한 전공투와 안보투쟁을 겪었고, 경제적 풍요와 함께 찾아온 다양한 문화적 시도가 축적된 바탕 아래 그저 경제호황으로 다들 흥청망청하며 안정된 사회를 살아가는 듯하던 당대 일본의 억눌린 기운이 10대 특유의 반항심과 접속해 휘몰아치는 주말, 그리고 태풍이 지나가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활짝 갠 날씨, 하지만 분명 그 안에 꿈틀대는 어떤 출구를 찾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영화는 그 시절에만 탄생 가능한 존재일 테다.
어른들은 <태풍 클럽>에서 철저히 객체 혹은 주인공들을 억누르는 반동적 인물/시스템에 그친다. 우리가 학원 청춘물에서 종종 기대하는, 인생의 조언자이자 스승으로 제 역할을 소화하는 이는 잠깐 등장하는 양호교사 정도에 불과하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수학교사 우메미야는 둘째 날에 일어난 소동 때문에 존경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등생이지만 고집이 세고 도덕적 결벽이 강한 미치코는 그런 우메미야의 수업을 들을 수 없다며 거세게 항의하지만, 해명을 수업 마치고 하겠다던 교사는 금방 이를 까먹고 만다. 홀로 교실에서 태풍이 다가오는 가운데 우메미야 선생을 기다리던 미치코는 고립된 가운데 모종의 위기에 처하고 만다. 아이들은 건물에 고립된 상태에서 담임인 우메미야에게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하지만, 이미 술에 취한 교사는 아이들을 구조할 경황이 없다.
그동안 내내 모범생 캐릭터를 굳혀가던 쿄이치는 기성세대에 대한 실망을 쏟아내듯 우메미야에게 선언문을 낭독하듯 그를 규탄한다. 그리고 처음엔 한심한 듯 지켜보던 다른 5명에게 가세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민해온 철학적 실존에 대해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그런 와중에 홀로 떨어져 도쿄를 방황하던 리에 역시 태풍으로 발이 묶인 채 온갖 기묘한 체험을 겪는다. 악천후에 휩싸인 도쿄는 우리가 아는 화려한 대도시의 야경이 아니라 초현실적 시공간으로 그려진다.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무정하고 차갑지만 기이한 것들로 가득한 그런 곳이다. 리에는 끝내 도쿄에 대해 이해하거나 매력을 느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사실 아이들이 동경하던 도쿄는 허상에 가깝다. 리에가 목격한 신기루 같고 위험천만한 풍경이 본질에 가까울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다 말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