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섯 번째 방> 스틸 이미지
씨네소파
그렇게 영화 속에서 효정씨는 마침내 두렵고 낯설긴 하지만 생애 처음 맛보는 바깥세상과 대면하게 된다.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두근두근 설렘을 황혼 초입에서 체험할 수 있는 K-어머니가 얼마나 될까? 설정으로 만들 수 없는 당사자의 결단을 담을 수 있는 건 다큐멘터리가 가진 특권일 것이다. 영화는 그런 예측불가 상황을 일정부분 편집의 묘를 통해 보완하려 시도한 흔적도 엿보인다. 이는 감독의 주제의식이나 세계관과 연동되는 대목일 것이다. '네 번째 방'인 2층에 입성한다는 건, 시어머니가 효정씨와 오랜 기간 분점해 온 집안 경제권의 온전한 쟁취로 해석 가능한 지점이다.
그런데 그 '천하통일'의 순간에 효정씨는 의외의 행동을 보인다. 경제적으론 유용하지 않은 허브를 심는 선택을 내린 것이다. 당연히 텃밭의 원래 용도라면 취향에 맞는 유실수나 작물을 재배할 텐데, 허브를 작은 책상 화분에서 확연히 너른 공간으로 옮긴 것은 본인의 처지와 심경을 투영하는 동시에 '빵과 장미'의 고전적인 등식을 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적 책임을 짊어지면서 '빵'을 해결하는 것으로 자립의 기반을 삼긴 했지만, 그에 머물러 시어머니처럼 유사 가부장에 그치지 않고 본인의 해방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결연한 표상으로 해석되길 기대한 것이리라.
<다섯 번째 방>은 출발점부터 비롯된 강점과 약점을 골고루 갖춘 채 끝까지 나아간 덕분에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노출한다. 아빠에 대한 부정적 묘사에서 충분히 강렬한 찰나를 잔뜩 확보했을 테지만 주저하고 망설이는 카메라의 떨림을 확인할 수 있다. 가족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물론 더한 경험을 겪은 이들이라면 치를 떨면서 감독의 태도가 이중적이라 비판할 여지도 발생한다. 엄마보다는 자신에게 확연히 친절한 아빠를 경험해서다. 그건 인지상정이긴 하다. 그런 면모 덕분에 <설국열차>가 선보이는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의 끝까지 가는 결단에는 영화적으로 도달하지 못한다. 아니, 스스로 포기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물론 이 역시 참작되는 지점이자 관객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대목이다.
영화는 전반부에선 감독의 아빠를 주역으로 담은 전작 단편들과 일맥상통하는 치고 빠지기를 선보인다. 아빠의 한심함을 전반적으로 묘사하지만, 자식이 된 도리로 차마 치부를 다 끄집어낼 수 없기에 타협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연출이 아니라 실제 발생한 일련의 사건과 사고들 때문에 영화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사이코 드라마처럼 변모한다. 해당 대목의 묘사는 과도한 선정성과 공포 조장을 막기 위해 애니메이션 효과를 활용해 감정 소모를 관리 가능한 선으로 억제하는 데 성공하지만, 뒤를 이어 등장하는 마치 아빠에게 변호권을 수여하듯 보이는 장면 때문에 온도 차이가 너무 크다. 가족으로서는 당연한 전환이지만 작가의 태도로선 너무 급격한 태세전환이라 고산지대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기분이다.
영화는 철저히 감독의 엄마 효정씨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딸이자 감독은 카메라 너머에서 관찰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 행위자와 관찰자를 동시에 소화하는 도전에 나선다. 그리고 가편집 버전을 노트북으로 보면서 '내가 또 악역인 거지?' 알면서도 묻는 '빌런' 아빠가 있다. 이 셋 외의 다른 가족은 객체에 가깝다. 효정씨의 시어머니이자 감독의 할머니, 감독의 분가한 여동생과 (가장 의문에 휩싸인 캐릭터이자 전씨 가문의 후계자) 남동생은 다소 캐릭터화된 역할만 부여받는다. 아무래도 출연하기 부담스럽거나 굳이 서사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 영화의 일정하게 기울어진 (물론 전혀 그 자체가 틀리지 않은) 구도 때문에 가족들이 영화를 본 소감과 이후의 삶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외부적인 이야길 조금 하자면, <다섯 번째 방>의 개봉 이전 상영회 때 감독의 가족과 친지들이 단체관람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주인공이라 할 효정씨나 감독의 여동생은 당연히 참석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본인들이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남편이나 시어머니 역시 함께 참석하는 풍경이 보였다(다만 남동생은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했고, 출연 자체도 거부감이 심했다고 한다). 가족이란 저런 것인가, 혹은 아내와 딸에게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K-남편/아빠의 심리는 어떤 걸까 기이한 체험이던 셈이다. 다만 굳이 그걸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섯 번째 방>으로 '자기만의 방'을 마침내 쟁취한 21세기 대구의 '버지니아 울프'는 잔뜩 알고 싶지만, 그 대척점에 있는 '경상도 남자'들에 대해선 너무나 잘 알기에 그렇다. 필자 역시 그 일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정보> |
다섯 번째 방 Her 5th Room
2024│한국│다큐멘터리
2024.06.05. 개봉│81분│12세 관람가
감독 전찬영
출연 김효정, 전성, 전찬영, 문옥이, 전나영, 전진호
제작 탄탄필름
배급 씨네소파
2023 20회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시청자·관객상
2023 5회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장편경쟁부문 심사위원상
2023 1회 미네소타필름페스티벌 장편 다큐멘터리 최고작품상
2023 10회 부산여성영화제 개막작
2022 24회 부산독립영화제 대상/관객심사단상
2022 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022 13회 광주여성영화제
2023 9회 경산여성영화제
2023 14회 익산여성영화제
2023 19회 인천여성영화제
2023 24회 제주여성영화제
2023 23회 전북독립영화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