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영화 <판문점>의 한 장면
다큐 영화 <판문점>의 한 장면앳나인필름
 
남북 대화의 상징인 판문점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판문점>이 오는 19일 개봉한다. 배우 박해일이 내레이션을 맡은 <판문점>은 정전협정을 시작한 1951년부터 아무것도 열리지 않는 판문점의 현재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판문점>은 2019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의 송원근 감독이 연출한 두 번째 작품이다. 영화를 어떻게 제작하게 되었는지 들어 보고자 지난 12일 서울 충무로 근처에 있는 뉴스타파 함께센터에서 송 감독을 만났다. 다음은 송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 영화 개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떤 기분이신가요?
"5년 전에 <김복동>을 개봉한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그때만큼 떨리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편인 것 같아요. 영화는 (만들고 나면) 관객들이 보고 해석하는 영역으로 넘어가는 장르예요. 관객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기대하고 있고요. 다큐멘터리 영화이기 때문에 흥행에 대한 큰 목표보다는 지금 남북 관계가 경색되어 있는데, 이 영화가 어느 정도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 <판문점>은 어떻게 제작하게 된 건가요?
"2021년 뉴스타파에서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3부작을 제작했는데, 그게 시작이었어요. 그때 <한국전쟁> 3부작 중 판문점에 관련된 부분은 미국 국립문서관리기록청에 있는 자료들을 참고해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들듯이 제작했어요. 그때는 코로나 시국이기도 해서 판문점도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취재도 용이한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다가 2023년 2월 판문점에 직접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 시민들이 판문점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판문점에서 있었던 정전협정을 통해 현재 한반도의 형태가 만들어졌어요. 그 이후로도 남과 북이 서로 싸우거나 문제가 있을 때는 항상 판문점에서 만났어요. 한반도는 평화가 유지되느냐, 유지되지 않느냐에 따라 불확실성이 커지거나, 작아지거든요. 전쟁이 일어날 것 같고 한반도가 불안하면 외국에서 어떤 관광객이 오겠어요. 한국에 있는 공장들이 어떻게 돌아갈까요. 외국인들이 한반도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잖아요. 쳐다보지도 않겠죠. 하지만 한반도에 평화가 유지된다면 여러 관점에서 새롭게 볼 거예요. 그런 면에서 한반도의 평화가 중요한 거죠. 때문에 판문점이 중요하다고 봐요."

정전협상 중에도 계속된 전쟁, 죽어나간 젊은이들
 
 다큐 영화 <판문점> 내레이션 녹음 하는 배우 박해일
다큐 영화 <판문점> 내레이션 녹음 하는 배우 박해일앳나인필름
 
- 배우 박해일씨가 내레이션에 참여했습니다. 섭외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해요.
"박해일씨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배우예요. 병자호란을 다룬 <남한산성>에 출연했고, <최종병기 활>에도 주인공으로 출연했죠. 2022년에 개봉했던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 역할을 맡기도 했고요. 쉬는 날에는 다큐멘터리를 본다고 말할 정도로, 다큐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시더라고요. 지난해에 섭외 연락을 드렸는데, 당시 정전 70주년이었어요. 정전 70년을 맞아, '판문점'이라는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있다고 제안을 드렸고 기획안과 원고, 편집된 영상을 보시고 충분히 의미가 있겠다면서 수락하셨죠."

- 판문점은 원래 지역 이름인가요? 전 건물 이름인 줄 알았어요.
"'판문'이 넓은 문이 있는 주막이거든요. 예전에 그 지역이 우리나라 말로 '널문리'(판문점의 옛 지명)에 주막이 있던 자리예요. 보부상 등 장사하는 사람들이 개성으로 들어가기 전 머물렀던 마을이 이미 조선시대부터 존재했고, 실제 1910년대에 일제가 제작했던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판문점이라고 쓰여 있어요."

- 1951년 7월 개성 내봉장에서 정전회담이 시작했다고 (다큐멘터리에) 나옵니다. 정전협정이 1953년에 체결되었는데, 꽤 일찍 시작되었네요.
"체결되기까지 2년이 걸린 거죠. 실제 1951년 7월 정전협상이 시작됐을 때 양측은 현재 휴전선 인근에서 전선을 형성해서 서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오지도 못하는 교착 상태에 빠졌어요. 서로 무의미한 소모전을 지속하기에는 군인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으니 부담스러웠죠. '우리가 휴전하든 정전하든 전투는 일단 끝내보자'라는 남측과 북측의 요구가 있었고요. 다들 협정이 일찍 끝날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포로 송환 문제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협상이 2년 동안 지속된 것이죠."

- 정전 협상 중에도 전쟁은 계속됐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고요.
"정전협정 조인에 이를 때까지 계속 전투해서 군사분계선은 계속 바뀔 수 있다고 서로 합의했어요. 때문에 정전협정 끝날 때까지 전투를 계속했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그 한 뼘 땅이 뭐라고 왜 그렇게까지 싸웠어야 했나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그 한 뼘이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아요. 그 고지를 얻기 위해 양쪽 다 젊은 군인들이 희생됐던 거죠."

- 이승만 정부는 전쟁 중에도 북진 통일을 외쳤잖아요. 북진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던 걸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건 모르겠어요. 다만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중국군이 참전하기 전 북한 압록강까지 쭉 밀고 올라갔죠. 중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다시 후퇴했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 입장에서는 다시 한번 밀고 올라갈 수 있다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UN군과 북한군이 맺습니다. 보통 협정을 맺으면 사인을 하고, 양측이 악수하지 않나요? 정전협정 후에는 왜 그런 게 없었을까요.
"당시 UN 연합군과 공산군이 협정을 맺을 때, 조인식이 열리는 건물을 2주 만에 지어요. 형식적으로 조인만 이루어졌을 뿐 실질적으로 악수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미군이 무차별적인 폭격을 하거든요. 굉장히 비윤리적, 비인간적으로 전쟁 양상이 흘러왔기 때문에 악수하면서 사진을 찍을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을 거예요.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군도 마찬가지였죠. 미국 입장에서는 다른 지역도 신경 써야 될 곳이 많은데 한반도에만 집중해 있으면 안 된다는 부분들도 컸던 것 같아요."

- 그 장면은 한국전쟁이 어땠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면이 아닐까 해요.
"맞습니다. 서로 얼굴도 쳐다보기 싫을 만큼 증오했었던 거죠."

- 정전협정 당시 남한군은 협정의 당사자가 아니었고, 남한군 대표자의 이름은 없어요. 그게 지금까지도 영향이 있죠. 북한은 우리가 아닌, 미국을 상대하려고 하고 있고요.
"그때 정전협정의 주체에 우리나라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건 지금까지도 답답한 상황을 만들죠. 실제로 현재 비무장지대 판문점의 관리 주체는 UN군이니까요. 우리나라 지역이지만 관할은 UN군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고위직이나 대통령이 판문점에 방문하려고 해도 UN군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안타깝죠."

판문점에서 대화를 나눴던 군인들
 
 다큐 영화 <판문점>의 한 장면
다큐 영화 <판문점>의 한 장면앳나인필름
 
-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합니다. 그 영향으로 7·4 남북 공동성명이 나온 건가요?
"영향이 있죠. 그러니까 정전협정 때도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이나 소련 스탈린의 죽음이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당시 남북도 평생 적으로 붙어서 싸울 줄 알았는데 전쟁을 치른 미국과 중국이 만나서 악수하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본 거죠. 화해 모드, 이념적으로는 다르더라도 경제적 교류는 가능한 상태가 되면서 우리나라도 변화가 필요했던 때였죠. 북한의 김일성이나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도 체제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어요. 서로 교류도 하는 모습도 보여줄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기 때문에, 당시 남북 공동성명은 세계 흐름의 일환이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 지금과 달리, 과거 판문점에서는 남북 군인들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나요?
"군인은 양측의 체제를 대표해서 근무를 서고 있기 때문에, 친구처럼 어깨동무하는 사이야 당연히 아니었을 거예요. 그래도 근무하면서 이름이나 고향을 묻는 정도는 했었다고 해요. 당시 미군이 이를 많이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남북 병사들이 이야기를 나누면 미군이 못하게 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 대화의 교류가 깨진 게 도끼만행 사건 때문이었다고요?
"결정적으로 깨진 건 그 사건 때문이죠. 이전까지는 판문점에서 미군, 북한군이 다투기도 하고 몸싸움도 했죠. 실제로 북한군이 미군 소령을 발로 밟아서 중상을 입히기도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싸우더라도 대화는 했어요. 도끼 만행 사건 이후 시멘트로 턱을 만들어서 군사분계선을 그었죠."

- 1991년 이후 군사정전위원회가 34년째 안 열리고 있습니다. 
"군사정전위원회가 안 열리는 건 정전협정을 통해 판문점이 만들어진 근본적인 이유가 사라진 걸 의미하는 거예요. 북한군이 1991년에 퇴장하게 된 이유는 UN군이 한국군 출신을 군사정전위원회의 대표로 세우려고 하자, 북한군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에요. 한국은 정전협정의 대상국이 아닌데 왜 한국군이 군사정전위원회의 대표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 제기죠. 그 후로 30년 넘게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리고 있지 않았어요."

- 판문점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날이 언젠가는 올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판문점이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UN군의 입장이 중요해요. UN군이 북한군과 대화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판문점>을 연출한 송원근 감독
<판문점>을 연출한 송원근 감독송원근 제공
 
- 최근 남북 관계가 더욱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최근 남북이 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서로를 이용해 불안감 조성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대북 확성기뿐만 아니라, 전단 문제는 한국전쟁 때도 있었고 그 이후 합의 하에 중단하기로 약속을 한 거예요. 지금은 다시 서로를 자극할 필요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문제라고 봐요. 불필요한 소모전은 도움이 되지 않죠. 이런 걸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판문점에서 만나야 하는 것 아닌가 해요."

- 영화 <판문점>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북은 지금 당장 판문점에서 만나야 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남북 갈등 상황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영화 <판문점>이 다루고 있어요. 단순히 한국전쟁의 영웅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살기 위한 몸부림이고, 그 이후 판문점에서 평화를 구축하고 대화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극장에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실제 한반도에 지금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송원근 판문점 남북대호 도끼만행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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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와 이영광의 '온에어'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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