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츄어리"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시네마 달
김정호 수의사는 여전히 바쁘다. 청주동물원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모범사례이지만 조금씩 개선되는 것만으로 갈 길이 멀고, 새로운 단계의 과제가 속속 대두되기 때문이다. 동물원의 전시활동에도 변화를 준다.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하고자 CCTV로 간격을 두고 인간과 동물이 원하지 않는 대면 접촉을 축소하는 시도는 조금만 발상을 전환해도 작지 않은 효과를 낼 수 있음을 입증한다. 단일 개체만 수용 중인 경우 다른 동물원과 협조해 보내거나 받는 방법으로 외로움을 줄여준다. 시설 공사 때마다 약간이라도 공간을 확장하거나 동선을 보장하려는 노력은 구경만 해서는 절대 깨닫지 못하는 전문가들의 영역이다.
최태규 수의사가 지향점을 분명히 하고 생츄어리 건립에 집중하고자 동물원을 떠났지만, 협력은 계속된다. 청주동물원 역시 일정하게 생츄어리적 측면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이어간다. 이 동물원은 우리가 연상하는 일반적인 형태의 동물원과 야생동물 생츄어리 사이의 중간단계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외래종의 경우엔 야생으로 복귀가 사실상 불가능하니 그들의 여생을 조금이나마 더 안온하게 보장하고, 토종 동물의 경우 방사를 고려한다. 하지만 인간이 원인이 되어 야생상태에서 생존하기 힘든 동물은 끝도 없이 들어온다. 어떤 경우엔 고의적으로 농약을 묻힌 먹이를 뿌려 떼죽음을 당하고, 고의는 아니지만 동물이 포착하기 힘든 시설물 설치 때문에 황당한 상황이 발생한다. 농수로에 갇힌 고라니를 구조하느라 인간들은 기를 쓰고 소리를 질러대며 뛰어다닌다. 한쪽에선 죽음을 조장하거나 방관하고, 다른 한쪽에선 어떻게든 살리려 악다구니를 쓰는 꼴이다.
덫에 걸려 날개를 다치거나 한쪽 발을 절단한 야생동물은 부지기수다. 여기에서 김정호 수의사를 비롯한 동물원의 인간-동물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모든 구조된 동물을 수용하고 관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멀쩡히 숨을 쉬고 주는 밥 잘 먹으며 인간과 시선을 교차하는 그들을 그저 행정적 애로 때문에 생명을 거두기란 동물에 대한 애정으로 이 일을 시작한 이들에겐 너무나 잔인한 노릇이다. 누군가는 오직 의학적 관점으로만 판단하려 하고, 다른 누군가는 일단 살리고 보자며 호소한다. 그나마 통합적인 대안으로 매뉴얼 가이드를 만들고자 시도해 보지만,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기준이 금방 뚝딱 나올 리 만무하다. 그저 탁상공론의 문제가 아니다. 수의사와 사육사들은 심하면 태어날 때부터 노쇠할 때까지 돌봐온 가족 같은 동물들을 상대로 그런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일상적으로 노출된다. 정서적 부담이 막심하다. 차라리 사람이면 의사라도 확인할 수 있지 이건 그러지도 못하니 더 환장할 노릇인 것이다.
그런 윤리적 딜레마는 영화 내내 이어진다. 동물마다 상황이 다 다르다. 인간의 생사가 개별의 수많은 사례이듯 서로 다른 종의 야생동물들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경험이 축적된 것과 달리 정보도 부족하고 사례도 턱없이 모자라다. 어쩌면 청주동물원과 구조센터 활동가들의 고통어린 결단이 미래의 매뉴얼이 될 판이다. 구조된 야생동물 뿐 아니라 병들고 쇠약해진 동물원 내 식구들도 고뇌에 빠지게 만드는 또 다른 축이다. 이렇게 계속 오래 살게 하는 게 진정으로 그들을 위한 일일까? 너무 인간 본위로 사고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조금만 아파도 안락사에 처하는 것 또한 인간 중심의 오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정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이기에 오직 실존적으로 결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츄어리>는 <동물, 원>에 비해 두배 정도 무겁게 다가온다. 전작에선 비교적 긍정적인 사례와 함께 인간-동물과 비인간-동물의 유대관계가 희망적인 기운을 유지했지만, 큰 기조 면에선 다르지 않은데도 고민의 깊이가 현저히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동물원이 야생동물 보호구역이자 생츄어리로 전환되길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