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마노엔터테인먼트
하지만 그런 타인들의 무관심과 배제는 또 관점에 따라 합리화될 구석이 존재한다. 그런 조명이 <양치기>의 탁월한 성취라 하겠다.
① 수현의 남자친구는 모함에 처해 곤란한 여자친구에게 정말 필요한 기댈 구석을 해주기는커녕, 교사로서의 평판이나 결혼식 성사 여부에 집착하는 면모를 보인다. 수현에겐 진실과 소통을 요구하지만 정작 자신 또한 중요한 결정은 자의적으로 내리곤 한다. 물론 그가 이기적이거나 수현에게 무관심하진 않다. 그저 적당히 타산적이고, 장래를 기약한 상대의 어두운 면을 끌어안기에는 각오가 부족한 것뿐이다.
② 수현의 엄마는 딸을 염려하고 아끼지만, 본인 역시 남편(수현의 생물학적 아빠)에게 시달리다 결별한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다. 그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서 딸을 보호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 역시 요한의 엄마처럼 자녀를 양육하느라 본인의 삶이 어그러졌다는 무의식적 감정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③ 수현이 근무하는 학교의 교감과 동료 교사 그룹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좋은 동료로 보였지만, 문제가 터지자마자 그를 의심하거나 혹은 제대로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 교감은 보신주의에 빠진 데다, 교장 승진을 앞두고 사건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기에 수현이 책임을 지는 선에서 봉합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수현의 상황을 악화시키기에 한 몫 톡톡히 한다. 동료 교사들 역시 몸을 사리며 연루되지 않으려는 기본자세를 견지하며 자신과 동급이던 수현이 점점 추락하자 그를 소외시켜 불똥을 피하려고만 할 뿐이다.
④ '진수'를 포함한 수현의 반 학생들은 초반에는 요한을 괴롭히거나 이를 방관할 뿐 아니라, 사건 이후 수현을 공격하는 데에도 그저 '재미' 삼아 가담하는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정작 일이 커지면 부모 뒤로 숨어버리는 행태를 내보이곤 한다. '촉법소년' 논란처럼 자신들이 저지르는 게 어떤 파장을 낳을지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일이 커지면 피할 수 있다는 조건을 악용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어도' 넘어간다. 학교 내 구성원 다수가 방관자로서 타인의 불행을 재미 삼아 거론하며 말이 옮겨질수록 눈덩이처럼 커지며 사태가 악화된다.
⑤ 요한의 엄마 & 사실혼 관계의 동거남은 그들 또한 사회적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게 쉽게 유추되는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현재 상태와 요한에게 가하는 정서적/육체적 학대가 정당화될 순 없는 노릇이다. 요한의 엄마는 학대의 주범이라기보다는 방조에 가깝고, 물리적 폭력의 주동자인 동거남은 경제적 능력이 취약해 얹혀살며 겪는 울분을 무력한 아이에게 쏟아낸다. 그들 각자의 처지는 동정할 구석이 조금 있을지 몰라도 자신보다 약자에게 배설하는 행위는 영화 속 사태 악화의 결정적 동력이다.
⑥ 요한 가족이 셋방살이하는 집주인 할머니는 누구보다 요한의 상황을 잘 아는 '어른'이지만, 상황 개선을 위한 어떤 의지나 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가 잠을 설칠 만큼 시끄럽거나 밀린 월세를 독촉할 때만 2층에 드나들며 역정을 낼 뿐이다. 영화 속에서 그는 모든 진실을 다 내려다보거나 혹은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상징적인 장면들에 등장하지만, 정작 그가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순간은 그저 상황을 은폐하거나 봉합하기 위함이다. 이 캐릭터는 개인이라기보다는 '이웃' 혹은 '동네'의 은유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아이'가 '아이'를 낳는 사회의 딜레마를 보여주다
영화는 영리하게 개별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변주하며 거대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 한국 사회의 초상을 음울한 색조의 풍경화처럼 묘사한다. 비록 영화의 마무리가 '열린 결말'이자 미래는 하기 나름이라는 주제를 풀어내긴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 사회의 앞날에 대해 평소에도 염려하던 이들에게 상당히 큰 충격과 고민을 던질 게 분명하다.
<양치기>를 보자마자 200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자, 국내에도 개봉했던 고(故) 로랑 캉테 감독의 영화 <클래스>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저소득층과 이민자 가정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중학교 교실을 배경 삼은 영화는, 겉보기엔 시끌벅적한 학교 내에서 열혈 교사와 다양한 배경의 개성 가득한 아이들이 벌이는 소동극일 것이란 기대를 짓밟아 뭉개버린다. 이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교사와 학생들이 벌이는 작은 전쟁과 돌발적 비극은 우리가 흔히 선망하며 이상화하곤 하던 서구 선진국 교육현장이 적지 않은 노력과 개혁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교육 불가능의 시대'로 치닫는 건 아닌지 불안에 빠지도록 만들고 말았다.
<클래스>를 보며 충격에 휩싸인 다음 10여 년이 지났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 학교현장은 그보다 더하면 더한 상황으로 보일 지경이 되었다. <클래스>가 무수히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가진 아이와 부모들 때문에 불가항력 상황에 가깝다면, <양치기>(와 교육현장 문제를 다룬 무수한 한국독립영화 작업) 속 한국의 학교 풍경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차별과 배제를 확대 재생산하며 억지로 서열과 계급을 설정 놀음하듯 찍어내는, 함께 자멸의 길로 추락하는 지옥도처럼 여겨질 정도다.
결국 <양치기> 속 초등학교의 세계는 우리 사회 현주소의 압축판 자체다. 과거를 굳이 비교한다면, 부모가 될 준비도, 억지로 부여된 책임감일지언정 감당하려는 결의도 부재한 이들이 아직 '아이'인 상태에서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었다. '어른-아이'들은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 감당할지 당황스럽기만 하다. 이들은 사회가, 보다 구체적으로는 학교가 자신들의 몫을 나눠 받아 해결해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길은 대학입시로 통하는' 고장이 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의지도 여력도 없는 사회는 이를 학교로 다 전가해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로 오늘날 학교현장은 실제로는 입시교육을 최우선으로 설정함에도 명목상으론 기존에 가족 공동체가 알아서 소화하던 기능 과반을 무한 책임지는 '도깨비방망이'처럼 상상되는 중이다. 당연히 탈이 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도 학부모도 간과한 게 있다. 사회적 차원의 직무유기와 부모들의 책임회피는 학교현장 구성원들도 별반 차이 없게 짊어진 문제라는 점이다. 자신들과 같은 세대가 교사가 되었다. 이들은 과거처럼 폭력과 권위로만 찍어누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른들이 저지른 차별과 배제, 성적 지상주의와 부에 따른 계급 구분을 극복할 재량이나 권한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수현처럼 아이들에게 공감하고 세밀하게 돌보려는 이들은 설 자리를 잃어간다. 오히려 교감이나 동료 교사들처럼 적당히 할 일만 하고 문제 생길 일 안 만드는 관료적 행태가 현명한 자기관리로 여겨진다. 교사가 그러면 되느냐며 혀를 끌끌 찰 수 있겠지만, 정작 우리 스스로 직장은 물론 사회 일반에서 선보이는 행태 그대로에 불과하다. '아전인수'도 적당히 해야할 노릇이다.
시민의식과 공동체 복원이 붕괴를 막을 유일한 해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