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방> 스틸컷
영화 <내 방> 스틸컷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자신의 노력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들이 눈앞을 가로막을 때, 비슷한 환경에 놓인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하필 꼭 자신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종종 억울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그런 상황이나 감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제대로 되지 못한 어리고 연약한 시절에는 더욱 그렇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지만, 받아들이거나 인정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렇게 되는 순간, 혼자 도태되어 무리로부터 멀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덮쳐온다.

영화 <내 방>의 시선 한가운데 놓인 지안(김지원 분)이 그렇다. 좁은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그녀의 등 뒤로 두 동생 지유(이지현 분)와 지호(김예성 분)의 고성이 멈추지 않는다. 지금부터 공부를 할 거라고 선언만 하면 가족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방해하지 않는다는, 더 간단히 문만 잠그면 된다는 친구들의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현실이다. 이 작은 방을 여동생인 지유와 함께 써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공부를 위한 아늑한 환경의 조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지금 지안에게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02.
청소년 시기의 인물을 들여다보는 영화에서 학교와 가정을 빼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며,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장소여서다. 인물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밀어 넣지 않는 한, 다른 대부분의 경우에 두 공간은 서로 상반된 자리에서 대립하는 의미로 이용되곤 한다. 동급생의 폭력에 시달리게 되는 학교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안온함을 지닌 가정, 혹은 학대로 물든 가정과 피난처로서 기능하는 학교와 같은 식이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두 공간 사이에서 인물은 입체화가 가능해지고, 화해와 성장의 서사는 움틀 여지가 생긴다.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 지안의 시간은 학교와 가정 두 공간으로 분할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대립하는 장소는 아니다.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해도 양쪽 모두의 공간에서 지안은 청소년기를 보내는 평범한 학생의 모습을 한다. 이 작품의 한세하 감독이 공간의 의미를 활용하는 방식에 눈길이 가는 것은 그래서다. 두 공간을 인물의 처지나 감정을 극단으로 몰고 갈 장치로 활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의 내면의 틈에서 자라나고 있던 불안과 서운함을 증폭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공간의 변화를 이끌어냄으로써 인물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두 공간의 미묘한 충돌을 통해 잠재된 감정을 꺼내고자 한다.

이는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인물의 예민한 감수성과 순수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도 기능한다. 극의 측면에서는 러닝타임을 통해 다루어야 할 중요한 요소 하나를 발굴하는 것이고, 관객에게는 우리 모두가 지나온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른이 되고 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결코 용서가 되지 않던 때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영화 <내 방> 스틸컷
영화 <내 방>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3.
영화는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두 공간의 요구와 응답을 샌드위치처럼 쌓아 올리기 시작한다. 공부하는 모습을 각자 촬영해서 함께 공유하자는 친구 하은(이지원 분)과 수빈(이주은 분)의 제안과 동생들로 인해 언제나 난장판인 방 안의 모습과 집안일을 도와달라는 엄마의 부탁이 서로 상응한다. 하나 둘 과외를 다니기 시작하는 친구들의 모습과 자신은 학원도 보내주지 않으면서 남동생 지호(김예성 분)의 공부를 위해 과외 선생님을 집으로 부르는 엄마의 모습이 또 한 번 마주하며 지안의 심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뜻대로 협조가 되지 않는 집안의 분위기가 단순히 심리적으로만 영향을 끼치고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불편한 상황에도 어렵게 공부하는 영상을 촬영해 친구들과 공유하지만, 그런 지안에게 돌아오는 것은 감성 있게 잘 찍어서 올리라는 핀잔이다. 요구에 맞추지 못하면 무리에서 제외해 버리겠다는 웃을 수 없는 농담도 함께다. 이 시기에 혼자가 되는 일만큼 두려운 일은 없고 이 모든 상황이 어쩐지 자신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내 방'을 가지지 못하는 집안 형편의 문제처럼만 느껴진다.

"제발 방 좀 치우라고. 왜 맨날 나만 아무것도 못하는데!"

지안의 가슴속에 빼곡하게 쌓여온 부정적인 감정은 좀처럼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두 동생을 향해 고개를 들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오롯이 두 동생의 잘못만은 아니다. 장녀로서 양보해야 하고 짊어져야 하는 일과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선택되지 못하는 일과 같은 공정하지 못한 대우에 대한 실망스러움과 지쳐버린 마음도 여기에 함께 고인다. 좋은 집에 살면서 매일 학교 시간에 좋은 차를 타고 데리러 와주는 엄마가 있는, 학원 숙제가 너무 많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모습까지 으스대는 것처럼 느껴지는 친구의 모습까지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기에 더욱 섭섭한 순간들이다.
 
 영화 <내 방> 스틸컷
영화 <내 방>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4.
영화의 말미에는 아무도 없는 지안의 집 안 모습이 스틸컷의 형태로 놓인다. 모르고 있지 않았지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던 집안의 모습을 그녀가 가만히 들여다보는 듯한 순간이다. 다음 장면에서는 방도 없이 거실 소파 아래에 누워 잠든 아빠의 모습이 이어진다. 영화의 신(Scene)이 인물과 공간의 화해를 중재하는 것만 같다. 지안과 그의 부모 모두 나쁜 마음을 가져서 서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다시 한번 말없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여기에 놓여 있을 뿐이다.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지안은 한동안 자신의 방을 가질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엄마의 뜻대로 동생들에게 큰 방을 양보해야 하는, 더 답답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지안이 계속해서 자신의 방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고 바라는 마음에는 잘못이 없다. 그 대상이 자신만의 오롯한 공간 정도라면, 그건 욕심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게 아닌가. 

물론 그 마음 때문에 몇 번은 더 속상할지도 모르고, 다시 또 화를 내거나 부딪히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마음을 포기하는 사람 말고, 그 마음을 잘 간직한 채로 다른 방법을 찾는 사람이 되어가기를 바란다. 있는 그대로의 영상을 보냈던 마지막 장면처럼 감추지 않고도 친구는 곁에 남아줄 것이고, 지금은 어렵게 느껴지는 가족들과도 솔직한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덧붙이는 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여섯 번째 큐레이션인 '엄마와 엄마의 엄마'는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인디그라운드 독립영화 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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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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