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브릿 어워즈(Brit Awards)에서 총 6개의 트로피를 거머쥔 가수 레이(Raye)
2024 브릿 어워즈(Brit Awards)에서 총 6개의 트로피를 거머쥔 가수 레이(Raye)Brit Awards

지난 3월 2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 O2 아레나에서 '2024 브릿 어워즈'가 열렸다. 1977년 시작된 브릿 어워즈는 영국 음반산업협회가 주최하는 대중음악 시상식으로서, 한 해 동안 발표된 영국 대중음악을 대상으로 한다. 라디오 DJ, TV 프로그램 진행자, 음반 제작사 대표, 언론인 등 산업 관계자 1000명 이상의 투표를 통해 후보와 수상자를 선정한다.

영국색이 강한 시상식인 만큼, 영국 외의 국가에서 발표된 음악은 주요 부문 후보에서 제외되고, '올해의 인터내셔널 아티스트', '올해의 인터내셔널 그룹', '올해의 인터내셔널 노래' 등의 부문에서만 경쟁한다. 한국 출신의 디제이 페기 구(Peggy Gou)의 노래 'It Goes Like(Nanana)' 역시 '올해의 인터내셔널 송'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 부문 수상 곡은 미국의 팝스타 마일리 사이러스의 'Flowers'였다.)
 
 레이(Raye)의 첫 정규 앨범 <My 21st Centuries Blues>
레이(Raye)의 첫 정규 앨범 Human Re Sources
 
올해 브릿 어워즈의 주인공은 싱어송라이터 레이(RAYE)였다. 레이는 올해의 아티스트, 올해의 노래(Escapism), 올해의 음반상('My 21st Century Blues'), 올해의 작곡가상, 올해의 신인상, 베스트 알앤비 액트상 등 총 6개의 상을 받았다. 이로써 레이는 역사상 한 해에 가장 많은 브릿 어워즈를 받은 아티스트로 기록되었다. 블러, 아델, 해리 스타일스마저 넘어선 수치다.

레이는 이미 시상식에 앞서 총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역대 최다 부문 노미네이트 기록을 새로 쓰기도 했다. (한편 지난해 브릿 어워즈는 올해의 아티스트상 후보가 모두 남성으로만 채워져 비판을 받기도 했다. 수상자인 해리 스타일스가 후보에 오르지 못한 여성 뮤지션들을 거명하며 대신 민심을 달랬다.)

신인상 수상자인 레이는 1997년에 태어났다. 1988년생인 아델이 이미 10여 년 전 세상을 지배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늦게 주목받은 편이다. 홀로 주목받기보다는, 거대한 스타들 뒤에서 그를 조력했다. 비욘세, 제니퍼 로페즈 등의 곡을 작업했으며 데이비드 게타, 조나스 블루 등 일렉트로니카 뮤지션의 곡에 피쳐링 보컬로 참여했다.

2014년 폴리도어 레코즈와 계약했지만, 음반사는 그녀의 잠재성을 억눌렀다. 많은 곡을 만들었고, 자신의 색깔을 살린 음반을 내고 싶었지만, 좀처럼 음반을 내 주지 않았던 것이다. 7년을 기다린 레이는 2021년 회사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데에 몰두했다. 래퍼 070 shake가 참여한 'Escapism'은 틱톡에서 유독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영국 더 오피셜 싱글 차트에서는 1위를 차지했고, 미국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이 곡이 실린 첫 정규 앨범 < My 21st Centuries Blues >(2023)는 타협하지 않는 레이의 야망이 담긴 작품이었다. 레이의 보컬은 에이미 와인하우스, 아델 등의 소울 보컬을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장르적 접근법은 더욱 다채롭다. 알앤비 위에 하우스와 댄스 팝 등의 장르적 요소를 자유롭게 엮는다. '취약성'을 드러낸 레이 자신의 이야기 역시 빛을 발했다.

지난해 레이는 자신이 열일곱살 때 한 음악 프로듀서로부터 당한 성폭력의 경험을 고백했다. 이 경험은 첫 정규 앨범 수록곡인 'Ice Cream Man'이라는 곡에 담겨 있다. 레이는 시상식 공연의 첫 곡으로 이 곡을 골랐다.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담담하게 이야기하듯 노래를 이어갔다.
 
"그 프로듀서가 나에게 DM을 보냈지."

"21살, 17살, 11살의 나는 '동의'의 뜻을 이해하지 못 했어."

"내 기분이 어떤지를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 내가 왜 조용히 자신을 탓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어."

- 'Ice Cream Man' 중
 

▲ RAYE - BRIT Awards 2024 Medley ('Ice Cream Man', 'Prada' & 'Escapism') ⓒ RAYE

 
음악 산업의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레이는 피해 경험이 공황 장애, PTSD 등의 상흔을 남겼다고 고백했다. 술과 마약에 빠져들며 자신을 탓하던 레이는 곡 말미에서야 "난 이제 정말 강한 여자가 되었다"며 고개를 든다. 그는 이 노래가 자신과 같은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위로로 닿기를 원했다.

빅밴드와 여성 코러스를 대동한 채 'Prada'를 부르며, 한층 밝아진 모습을 노래하던 그녀는 출세곡 'Escapism'으로 공연을 마무리한다. 자기파괴적인 섹슈얼리티를 다룬 곡이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레이는 어느때보다 당당하게 보였다. 강렬한 비트 위에서 절규하듯 노래했다. 레이는 강간 문화와 싸웠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음악 산업과 싸웠다. 한 인간의 투쟁 서사가 6분의 공연에 차곡차곡 담겨 있다.

올해의 앨범상을 받은 레이는 자신의 할머니와 함께 연단 위에 섰다. "이 트로피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라며 오열했다. "나는 그저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다"던 레이는 울음을 그치고 "난 이제 아티스트가 되었고, 올해의 앨범상 수상자예요"라고 웃어 보였다. 자신의 인생을 갈아넣는 아티스트는 청중의 마음을 약해지게 만든다. 국내에서는 아직 조금 생소한 이름이지만, 레이는 지금, 이 순간 영국 팝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이름이다.
레이 RAYE 브릿어워즈 브릿어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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