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스틸 이미지
판씨네마㈜
'입시지옥'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개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모든 길은 입시로 통한 지 오래다. 단 한 번도, 어떤 정권도 교육개혁을 외치지 않은 적 없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전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나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같은 청춘 하이틴 영화나 드라마에서조차 극한의 입시경쟁은 핵심적인 소재로 공감대를 얻고 있었다. '참교육'을 외치며 전교조가 결성되고 숱한 희생을 감수하며 교육현장을 바꾸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고괴담> 시리즈, 하다못해 조폭 코미디의 대표작이라 할 <두사부일체>에서도 교육 문제는 중요하게 작용했음에도 세상은 더 나빠지는 데 가까웠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가 그렇게 절규하며 사회의 그늘을 폭로했는데도 말이다.
이 영화 속에서 국가가 시민교육 방향을 제시하고 공공교육 질을 향상하고자 수립하는 교육과정 대계조차 이미 학부모들에겐 그저 입시과정 대응의 유불리로만 수용될 뿐이라는 사실은 대체 교육의 의미와 기능이 무엇인지 반문하게 만들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목적을 상실한 채 내 자식 잘되길 기원하며 노력을 경주하는 부모들의 초상은 그들이 체험한 학력자본의 결정력 때문에 이해할 수 있지만, 모두가 그렇게 막다른 길에서 제한된 동아줄에 매달릴 때 궁극적으로 어떤 파국을 맞이할지 상상하면 아찔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가 구사하는 코미디 기조 대신에 리얼리즘 설정으로 나아갔다면 그야말로 청소년 잔혹동화로 손색이 없을 법하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영화가 현실의 잔인함을 블랙코미디로 적절히 중화시키는 장기를 발휘한 데에서 그치지 않고,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는 고전 SF의 아이디어와 구상을 과감하게 도입해 펼치는 판타지 요소다. 지능을 가지고 논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동춘과 교감하는 막걸리의 정체성은 서구 고전 과학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던 외계에서 온 액체 혹은 에너지 형태를 띤 정신생명체와 닮은꼴이다. 어른들이라면 경악과 공포로 대처할 테지만, 마땅히 속내를 나눌 친구도 없던 동춘에겐 처음 만나는 낯선 친구인 셈이다. 비록 모스부호와 페르시아어 조합을 거쳐야만 텍스트 형태로 송수신이 가능함에도 부모나 친구들보다 더 누수 없이 소통할 수 있다는 특별한 상황은 그만큼 주인공이 처한 실질적 고립과 소외의 바로미터인 셈이다.
그런 초자연적 존재가 제시하는 방향은 또한 영재교육 과정에서 동춘이 거의 최초로 공개질문했던 생명의 탄생과 그 기원에 대한 물음과 닿는다. 이 또한 신기할 정도로 동춘이 왜 이해도 안되던 온갖 조기교육을 수행해야 했는지 자문자답에 척 들어맞는다. 모든 게 다 지적 설계가 있구나 하며 11살 주인공은 경탄하고, 막걸리가 제안하는 진화와 유토피아로의 진출을 의심할 필요도 없이 받아들이게 만든다. 어른들은 이미 전두엽이 발달해 불가능하지만 동춘과 또래 아이들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설명은, 주입식 조기영재교육의 폐단을 비웃으며 쓸모없는 지식을 비워내고 나서 진정한 초인이 된, 라블레의 풍자소설 <가르강튀아 이야기> 속 거인 왕들의 설정을 충실히 따라간다.
익숙한 고전 SF 명작들을 소환하는 상상력의 향연
그와 더불어 초자연적 존재가 제시한 모험을 향한 도전의 주인공은 동춘만이 아니다. 이 부분에서 영화는 아서 클라크의 고전과학소설 <유년기의 끝>이나 <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의 익숙한 설정을 연상케 하는데, 그 진화의 방향은 니체의 인간정신 3단계 설, 즉 '낙타'처럼 영문도 모르고 짐을 짊어진 채 고생하다 '사자'의 자세로 이해되지 않는 관습과 규범에 자유의지로 저항하고, 그 궁극에는 기존의 구습을 초월하는 '어린아이'로 발전한다는 주장에 충실하다. 11살 주인공의 살짝 초현실적 동화라고만 생각했던 선입견이 눈 녹듯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동춘과 같이 기회를 얻은 이들의 존재는 중의적으로 해석 가능한 열린 결말로 나아간다.
해당 묘사는 마치 기에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결말을 보는 듯하다. 현실에선 비극으로 끝나지만, 주인공의 상상 속에선 그가 원했던 모든 게 구현되는 이중적인 가설이 허용되는 그런 마무리는 아주 새롭진 않지만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해 더 반가운 보물의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 누군가에겐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떠올리게 할 잔혹동화의 색채로, 다른 누군가에겐 <나니아 연대기> 속에서 세상의 때가 묻으면 돌아가지 못하는 '나니아'의 존재감으로 기억될,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환상적인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그저 평범한 줄 알았는데 기이한 전복과 질주로 가득한 영화다. 극단적인 표현과 설정의 파괴력으로 관객을 놀래키는 한국독립영화는 드물지 않지만, 11살 아이를 주인공으로 이만큼 근본적으로 과격하게 해석 가능한, 그러면서도 교훈극으로 읽히기에도 무리가 없는 작업은 낯선 풍경이기에 더 반갑다. 연기라기보단 실제 '동춘'이 등장한 것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박나은 배우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되고, 베테랑 연기자들의 든든한 지원이 초중반 늘어질 수 있는 진행에 힘을 부여해준다. 동춘에게 모든 면에서 대칭이 되는 존재인 '나영' 역 한온유 배우의 이미지도 인상적이다.
물론 아쉬운 구석도 제법 있다. 장르영화적 개성에 매력을 느낀 이들이라면, 특히 후반부에서 좀 더 상세한 배경 설정과 장치가 아쉬울 테다. 또한 전체관람가 설정 때문에 주인공의 가족들 과거나 현재 상황 및 심리묘사의 세밀한 수위가 모자란 점도 한계로 기능한다. 하지만 여전히 아동 성장물에 요구되는 전제를 감안하면 이해할 만한 부분이다. 무엇보다 뚝심 있게 이 기이한 작업을 완성한 김다민 감독이 궁금해지고, 덩달아 감독의 해설 기회가 기다려지는 영화다. 관객들은 과연 동춘의 모험과 결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포인트가 될 테다.
<작품정보> |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FAQ
2024│한국│성장 드라마, SF, 코미디, 모험극
2024.02.28. 개봉│91분│전체관람가
감독 김다민
출연 박나은(동춘 역), 박효주(혜진 역), 김희원(영진 역), 한온유(이나영 역)
제작 ㈜안나푸르나필름
제공 (주)홈초이스
배급 판씨네마㈜
공동배급 ㈜홈초이스
2023 28회 부산국제영화제 오로라미디어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