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요나라 성종(요성종)이 1010년에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침공한 명분은 고려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옹립한 강조(康兆)의 반역을 응징해준다는 데 있었다. 그 결과, 강조는 1011년 1월 1일(기록상 날짜는 음력 11.24) 거란군에 붙들려 죽임을 당했다. 전투 초반에 거란군을 크게 격파한 강조가 방심한 나머지 한가롭게 바둑을 두다가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은 강조 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현종 편에 따르면, 강조가 죽임을 당할 때 3만 고려군도 함께 전사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정부는 전사자보다 유족을 더 어려워하고 두려워한다. 3만 전사자의 유족을 위로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들로 인한 재정 부담을 감내하기 힘들게 되자, 고려 조정은 군인과 유가족을 자극하는 조치를 내놓았다. 군인전을 거둬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현종 편은 1010년 이후에 군인 정원을 늘린 것으로 인해 조정 신하들의 녹봉이 부족해지자, 개경에 주둔하는 경군(京軍)의 토지를 회수하는 일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지난 17일 방영된 <고려거란전쟁> 제25회에서 이에 관한 어전회의 장면이 묘사됐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군인들의 발언권이 강해진 상태에서 취해진 이 조치는 불상사를 낳았다. '김훈·최질의 난'이 이 때문에 일어났다. 이때가 1014년이다. 정중부·이의방이 무신정변을 일으킨 때가 1170년이다. 이보다 156년 전에 김훈과 최질이 초기 형태의 무신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고려사> 현종세가(世家)에 따르면, 김훈과 최질은 1014년 11월 25일(음력 11.1) 쿠데타를 일으켰다. '개경의 가을'을 일으킨 이들은 무신이 문신 직책을 겸직해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 어사대를 금오대로 고치고 삼사를 도정서로 고치는 등의 행정 개편도 단행했다.
1170년의 정중부·이의방은 정변 이틀 뒤인 그해 10월 13일(음9.1)에 허수아비 임금인 명종을 옹립했다. 김훈·최질의 쿠데타 때는 이런 일이 없었다. 이는 현종이 역전의 승부수를 던지는 발판이 됐다.
고려 수도인 개경과 북진 기지인 서경(평양)은 라이벌 관계였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이 진압한 1135년의 묘청의 난 역시 양대 세력의 투쟁이었다. 김훈·최질 쿠데타 이듬해인 1015년에 현종이 구사한 방식은 서경 군대를 이용해 김훈·최질의 개경 군대를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훈·최질의 경군에 포위된 현종이 서경군을 불러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서경군이 움직이면 김훈·최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종이 구사한 방식은 구한말의 고종이 선택한 것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1894년에 동학군을 진압하겠다며 조선에 들어와 경복궁까지 점거한 일본군으로 인해 고종은 한동안 허수아비로 살았다. 그랬다가 1896년에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가 인근의 러시아공사관으로 들어가 일본의 간섭에서 비로소 벗어났다(아관파천).
고려 현종이 서경으로 행차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