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스틸컷
판씨네마㈜
11살 동춘(박나은)은 이것저것 해봐야 적성과 재능을 알 수 있다는 엄마의 실험체 같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대학 내내 장학금을 놓쳐본 적 없고 대기업에 취직해 연봉 6천까지 찍었지만 산후우울증으로 무너졌던 엄마의 대리만족 결과지일지도 모르겠다. 어른보다 더 빡빡한 시간표대로 국영수, 창의과학, 태권도, 미술, 코딩 등 하교 후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고 있었다. 내 나이 11살,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동춘은 인생 최대 고난에 봉착했다.
이것저것 해봤지만 큰 성과 없던 지루한 일상 중 동춘이 가장 잘하는 건 바로 '멍 때리기'. 태권도는 싫지만 명상 시간을 핑계로 공식적인 공상에 돌입할 수 있어 꾸준히 다녔던 진실은 함구하도록 하자. 그러던 어느 날, 엄마 혜진(박효주)은 계속해서 바뀌는 입시 정책 중 페르시아어 전형이 생긴다는 소문을 듣고 당장 페르시아어 학원 등록을 마쳤다.
대체 어디까지 해야 하지? 모스부호에 이어 페르시아 언어라니, 11살 인생은 그저 부모의 극성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 두 번 끄덕여 주는 것으로 끝내자고 합의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부모님은 기대에 찬 눈빛이었고 동춘은 영 탐탁지 않았지만 흥미를 붙일 만한 사건이 생겨나자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유일한 과목이 되었다.
발단은 며칠 전 수학여행에서 가져온 생막걸리 때문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침햇살을 먹고 버스에서 멀미해 사경을 헤맸다. 아이들은 레크리에이션이다, 불꽃놀이다, 분주한 때 숙소에서 숙면을 취하던 동춘. 문득 잠에서 깨어나 이끌리듯 복도를 서성이다가 소화전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이끌렸다. 데구르르... 동춘 발밑에 당도한 막걸리 한 병. 잠깐만, 소화전이 막걸리를 뱉었다고?
어리둥절한 동춘 앞에 순간 상상의 비밀친구 '털북', '숭이'가 말을 걸어왔다. '술이라는 걸 잊었냐고...' 고민 끝에 동춘은 다 마신 아침햇살 병에 막걸리를 조금 덜어 집으로 가져온다. 이후 막걸리는 경쾌한 탄산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도통 한, 중, 일, 영어, 프랑스어도 아닌 해석 불가의 언어로 떠들어댔다. 결국 엄마의 선견지명은 틀리지 않았던 걸까. 엄마는 다 깊은 뜻이 있었던 거다. 막걸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페르시아어만이 통했고, 로또 4등 번호까지 맞추자 확신의 찬 기대를 품게 했다.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어른의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