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세작, 매혹된 자들>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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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의 예친왕은 가상의 인물인 장령공주을 혼인 대상으로 특정했지만, 실제 역사 속의 예친왕 도르곤은 그렇지 않았다. 음력으로 효종 1년 3월 7일자(양력 1650.4.7) <효종실록>에 따르면, 친서 내용은 이렇다.
"너희 조선은 이미 우리와 하나로 합쳐졌으니, 만약 여기다가 혼인관계까지 맺게 되면 더욱 더 오래도록 견고해지며 둘로 나뉘지 않을 것이다. 왕의 어린 누이, 어린 딸, 혹은 왕의 근친이나 대신의 딸 중에서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행동이 의로운 이를 뽑아, 파견된 대신들이 살펴보고 돌아와 보고할 수 있게 하라."
도르곤은 청나라 건국시조인 누르하치의 아들이자 세조(순치제)의 삼촌이다. 조카를 대신해 실질적 최고권력자의 위상을 가졌던 그는 위와 같이 혼인 대상의 폭을 광범위하게 설정해 친서를 보냈다.
소현세자와 같은 해인 1612년에 출생해 1650년에 38세였던 도르곤이 이 결혼을 희망한 데는 무엇보다 정치적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패배를 복수하자는 북벌 여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전년도인 1649년 6월 22일(음력 5.13)에 출범한 효종 정권과 혼인동맹을 맺어 북벌론의 확산을 견제하려는 의중이 도르곤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더해, 명나라가 사라지고 청나라가 북경(베이징)을 차지한 1644년 이후의 정세 변화도 뻬놓을 수 없다. 명나라 동북쪽에 있을 때와 달리 북경에 들어간 이후의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한결 부드러워졌다. 중국대륙 중원에서 사방의 적들을 두루 상대하다 보니 이전 같은 억압적 태도로 조선을 대하기가 힘들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청나라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조선이 병자호란의 한을 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도 위험했다. 1650년의 결혼 제의는 이런 위험성을 낮추는 데도 도움이 됐다.
친서의 내용이 알려지자 자기 딸을 보내겠다고 나선 왕족이 있었다. 효종과 9촌간이자 서얼 왕족인 금림군 이개윤이 그런 자청을 했다. 그는 셋째딸인 1635년생 이애숙을 추천했다. 이 뜻은 효종에게 받아들여졌다. 효종 1년 3월 25일(1650.4.25), 효종은 15세 된 이애숙을 의순공주로 책봉했다. 친서가 전달된 지 18일 만의 일이다.
이애숙은 대단한 예우를 받으며 도성을 떠났다. 음력 4월 22일자(1650.5.22) <효종실록>은 임금이 서대문 밖에까지 나가서 배웅을 했다고 알려준다.
그렇지만 세상이 시선은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도성 백성들 중에 이를 본 사람들은 참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위 실록은 말한다. 동아시아의 실질적 최고권력자에게 시집간다고 보기보다는, 조선이 힘이 없어 애꿎은 여성이 원치 않는 데로 시집간다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병자호란 뒤에 청나라에 끌려간 공녀들을 바라보던 시선으로 이애숙을 안타까워 했던 것이다.
이애숙은 청나라에서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 <현종실록>에 실린 이개윤 졸기는 "구왕(九王)이 6만의 무리와 함께 요동 경계에 진을 치고 아내로 삼았다"고 말한다. 도르곤이 한성 서대문 밖 정도가 아닌 요동 경계까지 직접 나와, 그것도 6만 군중을 이끌고 나와 조선 공주를 맞이했던 것이다.
이애숙에 대한 도르곤의 첫인상은 매우 좋았다. 효종 1년 8월 27일자(1650.9.22) <효종실록>에 의하면, 의순공주를 수행하는 호행사(護行使) 자격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공조판서 원두표는 "구왕이 처음에 공주를 보고는 얼굴이 희색을 띠었으며 신들에게도 후히 대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도르곤은 이애숙을 만나기 전에 외모에 관한 사전 보고를 들었다. 청나라 사신은 도르곤이 기대감을 갖게 만들 만한 보고를 했다. 그렇게 높은 기대치를 가진 상태에서도 도르곤은 첫 만남 때 희색을 띠었다. 그 정도로 이애숙을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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