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랜 75> 스틸 이미지
찬란
<플랜 75>를 연출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2017년 당시 장편 버전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동아시아 영화인들이 연대해 연속 프로젝트로 기획 중이던 < 10년 > 시리즈의 일본판 제작 총괄을 맡았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기획에 참여해 단편 버전을 먼저 선보이게 된다. 2018년 공개된 < 10년: 일본 >의 옴니버스 구성에서 <플랜75>는 맨 처음 꼭지를 맡아 호평을 얻는다.
장편으로 예정된 시나리오에서 5명의 주역 캐릭터 중 1명의 에피소드를 뽑아내 독자적인 작업으로 완성한 단편 버전은 장편과는 다른 간결한 호흡을 선보인다. (장편이 2시간에 육박하는 데 비해 단편은 15분여 남짓한 분량) 화면이 밝아지자마자 '당신의 선택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라는 홍보광고 문구가 등장한다. 10년 후 근미래 일본에선 플랜75로 불리는 제도가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다. 7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정부가 조력사를 지원하는 것이다. 복지제도에 의존해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에겐 솔깃한 소식이다. 친절하게 상담에 응하는 인구관리국 공무원들과 오랜만에 말동무도 하고 일체의 장례비용도 국가가 부담해준다. 죽음 과정도 현대의학의 발달로 목에 스며드는 약으로 수면 중에 해결된다. 게다가 준비금으로 10만 엔의 용돈도 제공된다.
이쯤 되면 독거노인이나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이들에겐 선택지로 환영받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 쯤, 인구관리국 공무원들의 내부 회의에선 '높으신 분'의 일장 훈시가 이어지는 중이다. 제도의 효율성을 예찬하던 관료는 본래 플랜75의 의도를 드러낸다. '고위층과 중산층은 감안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을 써 주니까, 계속 소비하기 때문에 필요한 존재입니다.' 즉 플랜75는 이들을 타깃으로 삼을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플랜75가 노리는 대상은 누구일까? 관료의 발언은 거침없이 이어진다. '우리가 타깃으로 삼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지만 모두 묵묵히 그의 다음 발언을 기다릴 뿐이다. 남들이 꺼내지 못하는 정부의 목적이 마침내 공개된다. '저소득층, 몸이 불편한 사람. 즉 국가가 먹여 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을 줄이는 게 플랜75의 내부 목표다.
그런 가운데 지방 소도시에서 플랜75 업무를 맡은 공무원은 치매에 걸린 장모를 플랜75 프로그램에 넣자는 아내의 제안에 고민한다. 아내도 몰인정해서 그런 건 아니다. 오랜 돌봄에 지치고 자녀가 탄생하는 시점에서 미래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묵묵히 업무 상담으로 노인들과 대면해 차례로 상담자들을 조력사로 인도한다. 대사와 극적 전개보다는 묵묵히 사회적 순환의 부조리함을 그려내는 데 집중한 단편은 옴니버스 영화 속 단편들 중에서 가장 큰 화제를 불러왔다.
장편으로 완성된 <플랜75>가 선보이는 근미래 디스토피아의 풍경
어두컴컴한 교외의 어느 건물, 난장판이 난 채 망가져 있다. 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건물 내 복도를 배회한다. 무엇인가를 어깨에 메고 있다. 자세히 보니 장총이다. 그는 처리할 일을 다 마쳤는지 사무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그의 입을 빌어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 (본인들이 의도한 건 아니라는 점을 알지만) 노인세대가 미래세대에게 부담을 지우고 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넋두리가 흘러나온다. 자신 같은 이들이 희생해서 사회문제 공론화가 이뤄지길 희망한다며 유서이자 선언문을 남긴 그 남자는 총으로 자살한다. 이미 그런 '증오범죄'가 한두 건이 아닌 듯하다. 마침내 격렬한 사회적 논란 끝에 범인의 바람처럼 '플랜75' 제도가 법제화된다.
78세 여성 '미치'는 호텔에서 객실 청소부로 일하며 독립생활 중이다. 동료 할머니들과 함께 일하고 나서 밥도 먹고 장도 보며 노후를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보내려 한다. 하지만 정년이 다가왔다. 일을 그만두자 당장 월세 내기도 빠듯하고 새로운 일자리 구하긴 바늘귀 격이다. 미치는 주거지원과 취업을 위해 노력하지만 일은 영 풀리지 않는다. 그가 구직활동을 위해 찾아다니는 공공기관마다 플랜75 홍보광고가 상큼하게 흘러나온다. 일체의 심사도, 건강검진 결과도, 심지어 의사나 가족 동의 같은 것 하나 필요 없다며. 보건소에서 건강검진을 해보려는 중에도 대기실에선 플랜75 선전이 사방에 가득하다.
젊은 공무원 '히로무'는 플랜75 상담업무를 맡고 있다. 찾아가는 서비스로 빈곤한 노인들이 오가는 동네 공원에서 이동상담소를 열고 무료급식을 얻으러 온 이들에게 상담을 권한다. 상담업무에 매진하던 그에게 찾아온 노인 얼굴이 낯이 익다. 20년간 연락이 끊겼던 삼촌이다. 규정상 일가친척을 플랜75 프로그램 관련 상담할 수 없기에 다른 동료에게 넘겼지만 마음이 쓰이던 히로무는 삼촌의 거처를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미치는 그동안 자립생활을 고수해왔지만 아무리 일자리를 찾아도 답이 나오지 않기에 자존심을 낮춰 관공서에 생활보호대상자 신청을 해보려 한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방문하니 이미 신청시간이 지난지 오래다. 하지만 플랜75 상담은 24시간 내내 친절하게 이뤄진다. 결국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플랜75 신청에 서명한다. 준비금이 주어지고 예정된 날짜 전까지 콜센터는 24시간 대기하며 상담원과 연결해 준다. 미치의 전담 상담원 '요코'는 친절하게 전화로 이야기를 '15분 동안' 들어준다. 외로움에 지친 미치는 요코와의 대화를 기다린다.
필리핀 이주노동자 '마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어린 딸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일본에서 복지사로 일하지만 수술이 임박해 곤란을 겪는다. 주변의 소개로 보수가 더 좋은 정부기관의 일자리를 얻는데 플랜75로 조력사한 노인들의 시신을 처리하고 유류품을 수거하는 임무다. 자국민들이 피하는 일자리를 이주노동자들이 담당하기에 이곳에선 일본어가 아니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모든 게 기능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타국에서 알지 못하는 노인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마리아는 의문을 느낀다.
히로무는 삼촌과 교류하면서 플랜75 프로그램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알아보기 시작한다. 삼촌과 미치는 같은 날 죽음을 맞이할 예정이다. 미치는 전날 밤 내내 자신이 기거하던 집 정리정돈을 묵묵히 수행한다. 가는 길에 흔적을 깨끗이 하고 주위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태도다. 요코는 상담원 일에 지쳤다. 히로무는 업무 처리 과정에서 뭔가를 알아차린다. 그런 가운데 예정된 시간이 다가온다.
일본을 넘어 현대사회 전반에 던지는 근미래 묵시록적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