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세작, 매혹된 자들>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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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경과 조정석이 주연인 tvN 드라마 <세작, 매혹된 자들>은 가상의 인물들을 내세워 조선 후기 병자호란 이후를 다룬다. 현재 6회까지 방영된 이 드라마는 제3회 때 조선과 명나라의 비밀 접촉을 소재로 스토리를 전개했다.
드라마 속의 청나라는 병자호란 뒤에 조선과 명나라의 접촉을 엄금했다. 그런데도 조선은 명나라와 비밀 접촉을 하다가 청나라의 군사적 위협을 당했다. 이로 인해 주인공인 진한대군(조정석 분)이 비밀 교섭의 배후로 몰려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일까지 있었다.
실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부터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와 은밀히 소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청나라와의 화친을 적극 주장했던 주화파 최명길도 그런 주장을 했다.
음력으로 인조 15년 1월 30일(양력 1637년 2월 24일), 인조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 잠실에 소재한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거행했다. 이날 인조로부터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받은 청나라 태종(청태종)은 이틀 뒤 귀로에 올랐다.
주상 비서실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음력 2월 9일(양력 3월 5일)은 날씨가 맑았고 인조는 창경궁에 있었다. 이 날짜 <인조실록>은 인조가 명나라와의 비밀 교섭을 의제로 올렸다고 알려준다.
지금의 평안북도 서해안에 가도(椵島)라는 섬이 떠 있다. 1621년에 여진족 후금(훗날의 청나라) 군대에 쫓긴 명나라 군대가 주둔한 뒤로 이곳은 청나라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는 해상 기지가 됐다. 삼전도의 굴욕이 있기 하루 전날, 청태종은 이곳 점령을 위한 조·청 연합군의 합동 작전을 지시했다. 인조가 항복 의사를 밝힌 뒤였기에 이런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음력 2월 9일에 인조가 올린 안건은 '조·청 연합군이 가도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명나라에 미리 귀띔해 줄 것인가'였다. 위 <인조실록>에 의하면, 영의정 김류는 "지금 만약 통고하면 일이 일어날 게 확실합니다"라며 반대했고 좌의정 홍서봉도 동조했다.
주화파인 이조판서 최명길의 대답은 다소 모호했다. 가도 공격을 미리 알려줄지 말지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피한 채, '일단은 명나라에 국서를 보내 앞으로는 더 이상 연락하기 힘들다'는 뜻을 전하자고 제안했다. 공격 계획을 알려주자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지만, 가도 공격을 알려주는 국서를 보내자는 건지 절교를 선언하는 국서를 보내자는 건지 명확하지 않은 답변이었다.
조선을 의심한 청나라
최명길의 발언은 현대인들이 듣기에는 모호하지만, 이 일을 기록한 당시의 사관은 최명길이 명나라에 알려주자는 데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관은 "최명길은 시종일관 화친을 주장해 놓고도 이제 와서 천조(天朝)에 알려주자는 말을 하고 있으니 이것은 과연 어떤 진심에서 나온 것인가?"라는 논평을 덧붙였다.
인조는 최명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명길의 발언대로 했다가는 또 다른 위험이 닥칠 게 뻔했다. 불과 11일 전에 삼전도 모래바닥에 머리를 찧은 인조였다. 섬뜩한 느낌이 인조를 엄습했을 수도 있다. 무모한 답변을 한 최명길과, 무모한 줄 알면서도 그런 안건을 올린 인조의 모습은 명나라에 대한 미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그 정도로 강렬한 미련이기에 그것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청나라가 또 다른 합동작전을 제안했을 때는 그 미련이 보다 강하게 표출됐다. 인조 16년 8월 23일자(1638년 9월 30일자) <인조실록>은 "주상이 묘당(廟堂)에 지시해 믿을 만한 사람을 몰래 보내 우리나라가 부득이 군사 원조를 하게 된 상황을 진(陳) 도독에게 알리도록 하였다"고 말한다. '명나라를 함께 치자는 청나라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부득이 파병하게 된 사정'을 명나라 도독에게 알리라고 의정부에 지시했던 것이다.
그런 조선을 청나라는 끊임없이 의심했다. 이는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이따금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인조 20년 10월 13일자(1642년 11월 5일자) <인조실록>는 최명길이 청나라로 떠나게 됐다는 내용을 알려준다. 조·명 비밀접촉을 의심한 청나라가 최명길을 소환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던 것이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자결한 날은 인조 22년 3월 19일(1644년 4월 25일)이다. 최명길이 청나라에 소환된 시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은 명나라 멸망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명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그런 수모를 당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것은 1637년이고 명나라가 망한 것은 1644년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기간 동안 조선은 미련을 끊어내지 못했다. 이것은 명나라 멸망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조선의 대응력을 떨어트리는 요인이었다. 동시에, 보다 막강해진 청나라에 대한 대응력까지 함께 약화시키는 요인이었다. 명나라가 사라진 뒤에 청나라가 갖게 될 국력이나 위상은 물론이고 새롭게 전개될 국제정세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그처럼 과도하게 집착한 데는 조선 사대부들의 의리론이 크게 작용했다. 성리학적 대의명분에 입각해 명나라와의 동맹을 사수해야 한다는 논리가 사대부들의 여론 형성을 좌우했다.
조선이 명나라에 의리를 지키려 했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