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콥스키, 기도하는 영혼"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와우
챕터 1. '밝고, 밝은 날'
내 생각에 기억은
기이한 감정적 구조물이다.
몹시 중요한 것들이 거기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직업을 통해
상상력과 창의성을
맴돌며 살아간다.
(대본집 p14-15)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작품세계를 확인하기 위해선 그가 태어나 성장한 환경에 대한 이해는 필수일 테다. 도입부에서 감독의 육성 내레이션과 가족이 보관했던 사적 기록들을 통해 그의 유년기부터 성장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는 교수이자 시인, 어머니는 인쇄소 노동자였던 부모는 감독이 세 살 때부터 별거했고 자녀는 어머니가 책임을 지고 부양해야 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인 데다 1932년생인 그의 성장기는 무려 2천만 명이 넘는 피해를 겪은 2차 세계대전 독소전쟁 한복판이었으니 빈곤과 위험이 일상인 유년시절이었을 테다. 그런 가운데에도 어머니의 헌신으로 감독은 음악과 미술을 전공하며 대학에 진학한다. 그가 3살 때 아버지가 양육권을 요구했으나 어머니는 거절하고 이후 남편과 다시 재회하지 않는다. 어릴 적 겪었던 혼란, 그리고 전쟁과 가난 속에서 탈출구가 되었던 예술 체험이 감독의 인생 전체에 기초가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챕터 2. '시작'
해당 챕터에선 감독의 초기작 2편이 거론된다. 그의 영화학교 졸업 작품인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 1960>은 육체노동자인 청년과 소심해서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하던 소년의 우정을 중심으로 한 성장영화다. 감독은 꾸준히 비평가의 눈치를 살피기보단 본질적인 체험에 무게를 둔 작업을 시도한 바, 그의 영화 속에서 아이들의 존재감이 자리를 잡는 시금석 격인 작업이다.
어른들이 무언가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할 때
아이에게 물어야 한다.
아이는 그 답을
완벽히 알리라.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대본집 p26-27)
본격적인 전문 감독으로 자기 이름을 걸고 후속으로 선보인 건 보고몰로프의 단편소설 '이반'을 원작으로 한 <이반의 어린 시절, 1962>이다. 이 영화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불과 30 초입인 그에게 영화적 명성을 안겨준다. 하지만 당시는 소련 시절이다. 정부의 영화담담 부서에선 이 영화가 '파시스트 영화'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나치독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자랑스러운 '대 조국전쟁'(소련/러시아가 독소전쟁을 일컫는 표현)은 선악 구도가 명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전쟁 통에 모두 잃고 전선에서 첩보임무를 수행하는 소년병 '이반'의 묘사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의 참혹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당시 소련정부의 입맛과는 까마득히 먼 표현으로 가득했다.
전쟁에서는
무엇보다 희생자들을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쟁에는
승자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우리는 결국 패배한 것이다.
전쟁의 일부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본집 p30)
감독 또한 반전주의 경향을 숨길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희생은 컸지만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으로 예찬되어야 할 소련군이 PTSD 시달리며 죽어나가는 이야기는 해외에선 전쟁의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낸 수작으로 대접받았지만 정작 조국에선 외면당했다. 장 폴 사르트르 같은 명망 높은 지식인들이 감독의 영화를 옹호했지만 그 또한 감독의 생각에는 초점이 맞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고 아군이 정의의 편으로 형상화되어야 하는데 전쟁 자체를 혐오하고 평화주의를 촉구하는 태도는 작금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반전평화를 요구하는 양심세력을 탄압하는 러시아 정부와 우익의 양태와 고스란히 겹쳐진다.
챕터 3. '안드레이의 수난'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 중 하나가 징기스칸이 이끌던 몽골제국에 거의 전 국토가 짓밟혔던 '타타르의 멍에' 시대다. 해당 시기에 러시아의 국교라 할 '동방정교회'에서 성화 '이콘'의 대가로 알려진 실존화가를 주인공으로 한 시대극 <안드레이 류블로프, 1966>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본 작품은 칸영화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지만 이번에도 소련 정부의 입장은 싸늘했다. 영화는 완성된 후 5년 반 넘게 개봉이 금지되고 창고에 쳐박힌다. 타타르의 침략에 그저 신음하고 도탄에 빠졌을 뿐, 9개 에피소드로 조합된 대작 내내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시대상 묘사와 난해한 구성 덕분에 벌어진 일이다.
예술적인 이미지는
세상의 특별함을 담아내는
나눌 수 없는 무형의 무엇이다.
(중략)
우리는 그것을 순수한 형태로
인지할 수는 없으나
그 존재를 추측할 수는 있다.
(중략)
본질적으로, 시적 이미지는
해독할 수 없다.
(대본집 p44-45)
정부와 어용 평단에선 <안드레이 류블로프>가 반역사주의, 반러시아주의라 주장하며 격렬한 공격을 가한다. 초강대국으로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던 소련 입장에서 가장 숨기고 싶던 시대를 있는 그대로 풀어냈으니 불쾌할 게 뻔하다. 진영논리로 세상을 구분하고 '공식' 역사 서술에 부합되는 집단적 예술 창작을 덕목으로 여기던 소련 체제의 눈에 비친 타르콥스키의 영화 스타일은 개인주의와 예술지상주의 전형에 불과해 보였을 테다. 역사와 사회적 문제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주요하게 녹여내는 걸 단 한 번도 포기한 바 없는 감독이지만 소련의 공식 문화예술 교리인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동떨어진 채 작가의 주관과 시선을 견지하는 한 순탄한 운명은 불가능한 법이다. 기독교 신앙에 깊게 천착하던 감독의 정신세계는 세속의 권력보다 영성과 구원 앞에 단호한 태도를 이어간다.
챕터 4. '귀향'
감독은 뒤를 이어 동구권의 저명한 과학소설가 스타니스와프 램의 대표작 '솔라리스'를 원작으로 각색한 동명의 작품을 1972년 세상에 내놓는다. 하지만 타르콥스키의 시나리오 각색은 원작자인 램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원작소설은 스스로 사고하는 외계의 별 '솔라리스'가 탐험대로 온 지구인들의 생각을 스캔해 복제하면서 벌어지는 철학적 논쟁을 다루는데 타르콥스키는 소설에서 거의 전 분량을 점유하는 솔라리스 행성 배경을 제외하려 시도한 것이다. 원작파괴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충실한 교과서적 각색보다 훨씬 흥미로운 초월해석이라 감독은 생각했지만 끝내 램과의 불화로 원래 비전은 구현되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크게 성공한 것은 물론 당대 SF의 고전이 된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비견된다는 평가를 획득한다.
영화 작업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감독이 평생 고심한 유년시절의 추억과 함께, 러시아 고유의 문화전통인 시골의 별장('다챠')에서의 목가적 안식에 대한, 즉 '고향'이라는 테마가 종횡무진 펼쳐지는 챕터이기도 하다. <안드레이 류블로프> 챕터에서 신앙심이 깊었던 감독 본인의 '영성'에 대한 생각을 풀어낸 데 이어 공식 작업과 배경의 관심사를 묶어내려는 성격이 짙어진다.
챕터 5. '시간의 거울을 통해'
한숨 돌린 감독은 이번엔 그의 작업 중에도 가장 개인적이고 추상적이라 평가되는 <거울, 1974>을 선보인다. 감독의 청소년기 원 체험과 기억을 뚜렷한 스토리 대신 은유와 상징으로 구현한 작업은 난해하다는 평가에 시달린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가 반드시 극적인 서사에 묶일 이유가 없으며, 예술의 궁극은 '시'적 형태를 취한다고 단언한다. 그런 작가적 소신을 마음먹고 시도한 게 해당 영화가 될 테다. 예술의 장르 형식 대신에 본질적 영향과 효과를 중시하는 태도는 당대 서구 현대예술이 작가의 의도와 전기적 배경에 치중하던 것과 선을 긋는다. 과도한 작가주의 경향에 가려진 '결과물'로서의 작품을 강조한 것이다.
챕터 6. '미로에서부터'
감독은 <솔라리스>에 이어 재차 SF 원작에 도전한다. 동 시대 소련 최고의 인기 과학소설 작가인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작품을 원작으로 만든<스토커, 1979>다. 외계에서 운석이 떨어진 후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는 바람에 군대에 의해 봉쇄된 '구역 Zone'에 잠입하는 이들을 안내하는 길잡이의 이야기다. 감독의 스타일 마냥 난해한 서술과 실험적 형식이 어우러지지만 영화는 내심의 자유와 구원에 대한 고심을 초지일관 전개해나간다.
독특하게도 해당 작품의 구상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상당한 기여를 한 점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확인된다. 자유의지와 결단 후 실행의 딜레마를 통해 서구 자유주의와 당시 소련의 전체주의 통제 사이에서 모순되는 '자유' 개념에 대한 정의를 끊임없이 모색했음이 공개된다.
'햄릿' 뿐 아니라 감독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도 소환한다. 현실에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그만이 '구역'을 안내할 수 있는, 자신처럼 현실에서 극복하지 못한 고민과 숙제를 싸안은 이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려는 '스토커' 캐릭터 묘사가 어떤 의도 아래 진행이 되었는지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챕터 7. '<노스텔지어>의 기원'
하지만 세계적 명성에도 소련 체제와 감독은 타협하기 힘들었다. 1983년 차기작 <노스텔지어>는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지만 정작 소련정부는 타르콥스키가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시행할 정도로 사이가 벌어진 상태였다. 더 이상 소련으로 돌아가면 작품 활동을 이어가기 힘들다고 판단한 감독은 영화제 참석 직후 귀국을 포기한다. 소련 체제의 검열 및 간섭을 힘들어하긴 했지만 자신의 작품세계가 철저히 러시아 문화와 정교회 신앙에 기반을 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던 감독으로선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다.
대개 소련 체제에서 억압당한 지식인들이 대안으로 선택하게 마련인 서방 진영으로의 망명은 하지만 타르콥스키에겐 원했던 게 아니었던지라 그는 떠밀리다시피 선택한 서유럽 생활 내내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의 향수병이 나날이 깊어지는 과정, 그에 반비례해 내면적 구원에 한층 더 몰두하는 심경이 <노스텔지어> 작품 속 주제의식과 합을 맞춘다.
챕터 8. '종말 직전에'
뜻밖의 망명생활 이후 감독은 또 다른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조력으로 베르히만의 고국 스웨덴에서 새로운 영화를 작업한다. 그의 유작이 된 <희생, 1986>이다.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이지만 촬영 당시 이미 지병이 악화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지막 영화가 된 <희생>은 전작 <노스텔지어>에 이어 종교적 구원에 대한 고민과 도전을 심화시키는 내용이다. <노스텔지어>가 지구 종말을 막기 위해 촛불을 들고 물가를 왕복하는 고난을 다룬다면, <희생>에선 3차 세계대전을 막고자 자기 집에 불을 질러야 하는 수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단순명쾌한 제목 그대로인 영화다.
아주 먼 옛날, 한 수도원에
늙은 수도승이 살고 있었단다.
그의 이름은 팜베였지.
그는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산에 심었단다.
이렇게 말이야.
그러곤 제자
조안 콜로프에게 말했지.
"나무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매일 물을 주도록 해라."
(대본집 p128-129)
마치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대자'에서 불탄 나무에 싹이 돋길 기다리며 입으로 물을 머금어 운반하던 이를 떠올리게 만드는 시 구절이 형상화된 것 같은 <희생>은 동서 냉전의 격화와 체르노빌 원전사고 같은 환경파괴로 세상이 멸망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던 당대의 상황에 직면한 예술가의 실천 그 자체라 할 수 있겠다.
타르콥스키의 A부터 Z까지 총망라한 대하서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