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 부코> 스틸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
영화의 제목인 'Il Buco'는 이탈리아어로 '구멍'을 의미한다. 참 단순한 제목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다른 제목이 들어갈 수 있을까 궁금할 정도로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중심축은 오직 이 구멍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구멍이기에 그런 것일까?
영화 속 배경은 1961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깊은 수직 동굴 발견으로 기록된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지방의 '비푸르토' 동굴 발견이다. 무려 687미터 깊이를 자랑하는 이 동굴은 현재도 세계에서 3위 내에 드는 깊이를 가진, 그야말로 '심연'이라 지칭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곳이다. 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전문가들이 아닌,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에 있던 동굴 애호가 20대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찾아낸 공간이기에 더 인상적인 발견으로 기록된 장소이기도 하다. 그 조사과정이 고스란히 <일 부코>의 전개로 그려진다.
묘사는 마치 기록영화처럼 펼쳐지기에 구체적인 정보나 해설 없이는 관객은 지금 보고 있는 게 다큐멘터리인지 픽션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 눈을 크게 뜨고 영화 속 인물이나 배경의 시간성을 따라가면서 시간대를 추리하던 관객은 골짜기 한 편에 자리한 오래된 마을에서 주민들이 조그마한 흑백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는 장면으로 대충 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이후로도 인물들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성격의 대화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오로지 짐작하고 상상해가며 영화의 서사를 따라가야 할 뿐이다. 너무나 친절한 요즘 상업영화 전개에 익숙함을 넘어 길들여지다시피 한 관객으로선 당혹스러운 시간일 테다. 대체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이 작업을 선보이려 한 걸까.
하지만 눈썰미 좋은 이들이라면 조금씩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여러 결의 '충돌'과 '대비'로 관객에게 그들 각자의 관점과 구미에 맞는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려 한다. 아는 만큼, 상상한 만큼 그 성찰은 다채로운 양상으로 각자에게 들어설 테다. 굳이 공식적인 주제나 해설을 덧붙이지 않으면서 흥미로운 은유와 묘사가 이어지기에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시각예술매체인 영화의 전달력이 극대화되는 형태로 본 작품은 매혹적인 순간을 관객들의 뇌리에 아로새기려 도전한다.
이탈리아의 지역격차 문제를 상징화하다
관객 누구나 파악하기 어렵지 않은 건 평화롭고 목가적인 산골 마을 주민들의 고즈넉한 일상에 도시에서 찾아온 왁자지껄한 동굴 탐험대 청년들의 '침입'이 영화의 뼈대라는 점이다. 물론 조사단이 마을을 고의로 침략한 건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들은 요즘으로 치자면 열혈 동굴 애호가로, 본능에 따라 그들이 열광할 신천지를 발견한 것뿐이다. 그리고 이미 산골 마을 역시 바깥세상의 변화와 조응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몇 차례 반복되는 마을의 (아마 유일할) 골목 작은 카페 앞 텔레비전 시청 장면은 그런 의미심장한 상징의 절정으로 기능한다. <검정 고무신>이나 <응답하라!> 시리즈를 즐겨본 이들이라면 너무나 친숙할 법한, 다만 배경만 우리 1960년대 농촌마을에서 이탈리아 남부 산골로 옮긴 것뿐인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넋을 놓고 저녁시간대에 동네 몇 안 되는 (나름대로 유지 급에 속할) 집 안채에 귀하게 모셔진 조그만 흑백 텔레비전 수신기 앞에 넋을 놓고 쳐다보던 풍경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당시엔 아마 세계 곳곳이 다 비슷했을 테다.
그들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화면에는 이제 막 준공된,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초고층 신축 마천루가 한창 소개되는 중이다. 이탈리아 북부 대도시 중심부에 자리한 '피렐리 타워' 풍경이다. 리포터와 연예인이 수다를 떨어가며 이 고층빌딩을 예찬하며 그 위광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를 새 없이 속사포로 떠든다. 층마다 문명의 이기인 엘리베이터가 서고, 방마다 에어컨이 장착되어 있다고 한다. 단지 건물 하나 속에 수십 수백 가지 분야 종사자들이 마치 마천루 자체가 하나의 대도시인 양 빼곡하게 자리한다. 생전 대도시 마천루 구경해본 적 없을 산골 주민들은 외계 우주를 보는 기분일 테다. 스쳐 지나가기 쉬운 이 장면 하나로 현재도 이탈리아 사회문제의 대표적인 갈등 축인 남북문제가 순도 높게 묘사된다.
동굴 조사단 청년들은 북부에서 왔다. 산골 마을은 이탈리아 반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뼈대, 아펜니노 산맥 끝자락에 자리한, 이탈리아를 장화로 비유하면 그 발가락 끝부분인 칼라브리아 지방에 있다. 이탈리아 북부는 프랑스나 독일과 맞닿아 있고 유럽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활기찬 심장부에 속한다. 산업과 경제의 중심은 전부 북부지방에 있다. 2차 세계대전 패전의 상처를 딛고 고도성장의 수혜를 입은 북부는 이제 고층빌딩이 매일 올라가고 다양한 취미와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단계로 진입한 상태다. 하지만 동굴이 있는 이 남부 끝자락은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적 발견이 될 동굴 또한 그저 소떼들이 지나가다 무심히 쳐다보고 마는 구멍에 불과했다. 고단한 일상을 영위하는 데 그 동굴은 아무 의미가 없이 자연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은유적 장치로 구현한 '남 vs. 북', '제국 vs. 식민지' 시선
▲영화 <일 부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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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 세계적 발견이 시작되었으니 곧 작은 마을과 동굴은 떠들썩하게 화제가 될 운명에 처하고 말 테다. 그들만의 빈한하지만 평화로웠던 삶은 이제 곧 미디어와 탐험대에게 침공 당할 게 분명하다. 물론 그렇다고 워낙 오지에 속하는 이 동네가 개발 열풍에 휩싸일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어쨌건 이제 외지인들은 그들의 삶에 간섭하며 원하건 원치 않건 이 공간에 변화를 강제하고 말 것이다.
조사단은 처음 미지의 구멍을 내려가면서 잡지를 찢어 불을 붙인 후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불길은 구멍의 깊이를 실감하게 만들며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한다. 아마 혹시 모를 인화성 가스의 존재나 위험한 동굴 속 생물들을 파악하기 위해서일 테다. 디테일한 실증적 묘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기능성 묘사 외에도 할 말이 남은 것 같다.
그 타다 남은 잡지 지면에는 전후 이탈리아 경제 부흥의 상징이라 할 '피아트' 자동차 광고나 당시 세계 정치의 정점에 있던 케네디 대통령(이 영화의 배경은 1961년이다!)의 사진이 인쇄된 채다. 북부 도시 vs. 남부 시골의 대비와 함께 산골 오지마을에 침투하는 세계의 동시대성을 은유하는 효과적인 장치들이다. 도시인들을 싣고 온 트럭은 계곡에 정차한 채 캠프를 설치해 작은 마을을 이룬다. 그리고 북부 부의 상징 피아트 자동차 광고지는 지금껏 침범을 허락지 않았던 깊은 동굴 바닥에 침범해 인위적인 표식으로 남는다. 시간이 정지된 듯 무심히 흘러가던 이곳에 어느새 서력 시간대가 각인된다.
그렇게 영화는 몇몇 장치를 통해 마치 이탈리아 북부가 자신의 부와 세력을 남부의 척박하고 가난한 산골까지 전파하는 과정처럼 동굴 탐험대의 행적을 그려낸다. 그들이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간에 이제 시간을 되돌릴 순 없어 보인다. 마치 한국의 서울공화국 vs. 지방 식민지 구도처럼 이탈리아 정치에서 가장 큰 갈등의 핵심 중 하나인 남북문제가 전혀 상관 될 것 하나 없어보이던 동굴 탐험 스토리를 통해 효과적으로 은유되는 것이다. 또한 동굴이 있는 이탈리아 남쪽 산골마을 풍경은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촉발한 아메리카 대륙 침략과 정복의 역사의 무대인 마야와 잉카 문명의 요람과 닮은꼴처럼 다가온다. 너무 나간 상상일 수 있지만 식민주의 정복자들의 초창기 군상을 다룬 영화작가들의 작업과 <일 부코> 속 칼라브리아 산골 배경은 무척 비슷한 질감으로 다가온다.
21세기 영화예술의 새로운 도전을 목격하라
지금까지 피상적인 감상과 해석을 덧붙인 것만 보면, 동굴의 비밀과 산골의 목가적 평화가 북부 도시 탐험가들에 의해 무력하게 허물어지는 것 같지만 영화는 그렇게 일방적인 희생양 묘사로 그치지 않는다. 곳곳에서 지극히 고요하게 충돌과 파열이 드러난다. 그런 찰나들이 흥미롭게 해석될 여지를 거듭 추가시킨다.
골짜기 한복판에 정차한 트럭과 그 주위에 원처럼 배치된 캠프는 마치 서부개척시대 개척민들의 포장마차 요새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그 공간의 원래 주인인 방목되는 가축 무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캠프 주변을 거닐며 풀을 뜯는다. 이방인은 잠깐 왔다 떠날 뿐이지만 소와 말들은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계속 그곳에서 살아갈 것임을 천명하듯 유유히 지나간다. 호기심 많은 말은 천막 안에 뭐가 있나 깊이 잠든 탐험대를 살피기도 한다. 하지만 소떼는 자기들 앞에 바람결에 날려 온 동굴 내부 세밀화 스케치에는 무관심하다. 그들이 건드릴 영역이 아니란 지혜 때문일 테다. <일 부코>는 성질 급한 대도시인들에게 전혀 다른 속도감을 권유하는데, 이에 적응하지 못하면 분통이 터질 테지만 차분히 그 이질적인 감각에 적응되면 또다른 차원의 놀라운 발견을 선사하려는 인심이 후한 작업이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동굴 탐험과 교차되는 마을 노인의 병상 풍경은 상반되는 해석이 가능할 테다. 동굴의 실체가 외부 탐험대에 의해 밝혀지는 것과 비례해 노인의 생명은 꺼져가는 것처럼 묘사되는데, 이는 마치 인간의 손길을 거부해온 자연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그 마력을 다하는 것과 연동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여기에서 노인은 동굴은 물론 대자연의 수호 정령처럼, 그리고 그 존재가 봉인이 해제된 구멍에서 빠져나가버린 기운처럼 수명을 다했음을 상징하듯 보인다. 여기까지라면 그저 북부에 의한 남부의, 인간에 의한 자연의, 서구에 의한 3세계의 패배와 정복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골짜기를 가득 메운 짙은 안개 속에서 노인이 당나귀를 부르던 휘파람이 들려오기 시작하면, 그런 대비와 회한조차 인간의 감정에 불과하다는 듯 도도한 자연의 위력이 체감되는 것만 같다.
<일 부코>는 기이하지만 압도적인 감흥을 남기는 영화다. 탐험대가 동굴이 감추고 있던 엄청난 깊이에 위압되는 표정을 짓던 것처럼 관객 또한 영화 속 풍광에 최대한 근접하는 체험을 통할 때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형태의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기왕 영화를 볼 결심을 했다면 꼭 극장에서 경험하기를 권한다. 요즘엔 독립영화라 해도 관객의 이목을 끌고 선택받기 위함이란 명목으로 상업영화나 웹 드라마 문법을 닮아가는 세태에서 이 영화는 더욱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영화'가 영상예술의 최전선에 여전히 서 있으며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소리 없이 증명하는 실증사례로서 손색이 없는, '발견'을 기다리는 작업이다.
<작품정보> |
일 부코 Il Buco
2021|이탈리아|드라마
2024.01.24. 개봉|전체관람가|97분
감독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각본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지오바나 줄리아니
출연 파올로 코시, 자코포 엘리아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빅브라더스
2021 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2022 35회 유럽영화상 유로피언 음향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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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