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사랑"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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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던 새천년 전후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하지만 기능적으로 밀레니엄을 맞이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소재로 활용할 뿐, 지나치게 깊게 파고들진 않는다. 그 대신 '영미'와 '유진'의 동떨어진 것 같지만 실은 무척 닮은꼴 고슴도치 캐릭터들이 가까워지는 과정 묘사에 집중하려 한다.
영미는 정직테크에서 근무하던 시절 회사 직원들이 그를 우습게 여기며 조롱하듯 붙이던 별칭 '세기말'처럼 음울한 기운을 뿜어내던 존재다. 사연은 모르겠지만 부모를 여의고 큰어머니의 한복집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얹혀산 지 오래로 보인다. 자연히 어릴 적부터 눈칫밥 신세였을 게 뻔하다. 공금유용을 메우기 위해 늦은 밤까지 아르바이트를 위해 돌리는 재봉틀도 한복집 시다처럼 일하며 자연스럽게 익혔을 테다. 큰오빠는 치매 걸린 자신의 모친을 돌보는 일은 내팽개치고 집안 재산 빼먹기만 하면서 심지어 영미에게 빌린 돈도 갚지 않고 떼어먹었다. 치열도 고르지 않고 촌스러운 패션에 외톨이로 매사에 웅크리고 숨은 형세다.
유진은 집안내력인 유전병으로 목 아래는 움직일 수 없는 지체장애인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물론, 외모 때문에 성적 모욕까지 겪다 보니 심성이 거칠어진 탓인지 장애 등급에 빗대어 '지랄1급'으로 불리며 장애인지원센터 직원들 사이에서 기피대상이 된 지 오래다. 남편인 도영이 공금에 손을 댄 것도 유진이 명품을 툭하면 구입하며 씀씀이가 컸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두 사람이 동거하게 되었으니 막장 드라마 설정으로 보면 그야말로 '적과의 동침' 자체다. 머리채 쥐어뜯고 매일 육두문자 질러대며 싸워도 모자랄 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고 있던 기본정보는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정확하지 않다는 게 차츰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미는 유진에 대해 사치 때문에 남편을 감옥살이로 내몬데다 성질 고약한 '나쁜 장애인'으로, 유진은 영미를 자기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며 함께 공금횡령에 가담한 상대쯤으로 여겼지만 사실관계는 그들 각자가 알던 것과 무척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둘의 공통분모인 '도영'은 성이 구씨라 '구석기'라 불리는데 2000년이건 2024년이건 현실에서 보기 드문 지고지순한 존재에 어울리는 별명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매우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실제 그의 등장은 영화 초반 20세기의 끝자락(해당 부분은 흑백으로 묘사된다)과 영화 끝자락에서 원격으로 모니터에 등장하는 지극히 짧은 분량에 머문다. 사회적으로 온당한 권리와 대우에서 소외된 두 주인공을 만나게 해주고, 실은 보석처럼 빛나는 그들의 진가를 알아봐준, '전설 속의 동물'이 도영의 몫인 셈이다.
우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파되는 긍정과 희망
영미는 납작 웅크려 묵묵히 주변의 학대와 모욕을 참고 견디는 방식으로, 유진은 위악적인 가면을 쓴 채 타인에게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고집불통에 기선제압 스타일로 버티고 견딘다. 둘의 생존방식은 초반에는 정반대 양상으로 보이지만 무색무취건 악다구니를 쓰건 둘 다 사회적 약자이자 주변에서 이용하거나 착취하기 좋은 먹잇감으로 간주되는 대상인 건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 각자가 겪고 있던 고통을 서로 목격하고 유일한 '편'이자 '아군'이 되어주면서 둘의 관계는 급속히 진전되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물론, 그들 스스로의 변화를 이끄는 촉매 작용 또한 함께 생성된다. 누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역할을 주체적으로 찾아내면서, 누구는 자기 내면에 감춰진 슬픔과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돌파할 동력을 얻게 되는 셈이다.
영미와 유진 주위의 인물들 대부분은 (영미의 큰오빠 정도를 제외하면) 둘의 고통을 일정부분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만만한 상대로 치부되는 둘에 대해 이기적으로 이용하려는 욕망을 일정부분 품고 있던 이들이다. 영화 밖 현실에서 만만하게 보이는 상대, '호구' 격의 존재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평범한 자화상 같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런 존재들이라도 주변에서 사라지면 견디기 힘들어하던 주인공들, 특히 까칠한 성격 유세하는 유진은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자신은 아무리 센 척 해봐야 휴대전화 확인도 못하는 핸디캡에 처해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조금만 톤을 다운시키면 지독히 차갑게 묘사 가능한 해당 대목들이지만 감독은 한없이 추락시킬 의도는 없다는 걸 관객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요즘 같은 시기에 그렇게 늪지대로 빠져드는 기분을 관객이 견디기엔 무리가 있다는 동시대적 공감 같은 기분이다. 그렇게 현실의 암울한 기운 넘실대는 배경이지만 솟아날 구멍은 남아 있다는 안전장치를 감독과 제작진은 공들인 장치와 풍경을 통해 효과적으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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