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럽 제로> 스틸 이미지
판씨네마㈜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은 그림 형제의 동화로 잘 알려진 '하멜른의 쥐 잡이(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21세기 상류층 기숙학교라는 배경에서 풀어내려 한다. 쥐떼의 창궐로 몸살을 앓던 하멜른 시의 시장과 유지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가 쥐를 한데로 몰아가 퇴치한 덕분에 한시름 놓았지만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그에게 약속한 보수가 아까워 핑계를 대기 시작한다. 화가 난 피리 부는 사나이는 이번에는 도시 전체의 아이들을 피리 소리로 매혹시켜 어디론가 데려가 버린다. 오직 귀가 들리지 않아 피리 소리를 듣지 못한 아이 한 명만 뒤처져 남는다. <클럽 제로>는 놀라울 만큼 이 전래동화 기본 줄거리의 판박이 형태를 취한다. 결말은 결국 하멜른의 어른들이 아이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혹자는 아이들이 다 죽음을 맞았다고 해석하고, 다른 이는 이들이 고향을 떠나 소년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다 모두 노예로 팔려갔거나, 혹은 외진 오지 개척과 식민사업에 동원되었다고 판단한다. 어떤 결론이건 간에 생과 사를 초월해 부모세대와 단절된 운명을 맞았다는 건 동일하다. 결말 역시 영화는 모호한 마무리로 중의적 해석을 가능케 한다. 그만큼 그저 어릴 적 읽고 깜깜해진 그림 형제의 동화책이 내포한 원문 내용을 소화해야 해당 작업의 정수에 도달할 수 있는 셈이다.
13세기에 소도시에서 130명의 아이가 실종된 역사적 사건을 기원으로 하는 전래동화가 700여 년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내려앉은 영화 속 배경은 사회 최상류층이 다니는 기숙학교다. 이 학교는 입시교육에 매달리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체육과 음악, 미술 같은 문화예술 소양은 물론 인문교육 위주로 교양과 신체단련까지 골고루 가르친다.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회에 참여하는 부모들 역시 서로 겉으로는 친화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미스 노백의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각자의 감추고픈 모순적 이면을 가진 것처럼 부모들 역시 겉으로 보이는 자녀에 대한 애정이나 그들이 물질적으로 베푸는 배려 외엔 제대로 된 훈육이나 보살핌을 방기하고 있다는 것을 관객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이중의 실패: 부모와 학교의 책임전가 속에서
<클럽 제로> 속 부모들은 모두 일그러져 있다. 민감한 청소년기에 자녀만 홀로 남겨두고 아예 해외에 있거나, 자신이 못 이룬 한계를 자녀에게 과다하게 투영하거나, 자신들의 선택이 실수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다 더 큰 위험을 초래하는 등 이 영화 속 부모들 중 제대로 된 어른으로 조명되는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물리적 시간이 제일 부족하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처지인 벤의 홀어머니만 가장 먼저 위기를 인식하고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다른 학부모들의 방관과 무책임 때문에 그의 노력은 소용이 없어지고 만다.
영화 속에서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와 보내는 짧은 시간 중에도 직접 요리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나마 사태를 해결하려는 이들이 손수 만든 음식을 자녀와 나누려 할 뿐이다. 벤의 어머니가 고단한 퇴근 후에 손수 준비한 소박한 만찬은 어쩌면 자식을 구할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어머니의 애정에 자식 또한 감사해 하지만 그는 그 감사를 다른 방식으로 답하고야 만다. 건조하게 묘사되는 이야기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슬픔이 깃든 장면으로 꼽을 수 있겠다.
부모들은 비싼 돈을 들여 좋은 기숙학교에 보냈으니 자신들은 할 일 다 했다며 안심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거기에 더 욕심을 내어 학부모회의 권위로 부모가 선택한 교사를 별도로 파견한다. 그리고 교장은 학부모회의 재정지원 때문에 다른 교사들의 우려와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켜보자며 방조로 일관한다. 그 역시 미스 노백의 확신에 찬 식이요법에 정작 내용은 확인도 않고 찬동한다.
그런 교장의 행태는 또 다른 전래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맹신하기만 할 뿐 정작 이성적 사고와 맡은 책임에 대한 고민은 부재한 우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어떻게든 사태를 봉합하고자 할 때에도 미스 노백이 감춰둔 진짜 계획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 채 추문이 될까봐 외형적인 문제에만 골몰한다. 부모의 실패에 이어 학교의 실패도 연속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두 집단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거나 애써 억지 논리로 실상을 회피하려 할 뿐이다.
서구사회의 세대갈등과 반문화 경향을 소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