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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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같은 측면도 있었지만, 옷 선물은 크게 보면 김은부 가문의 지위를 높이는 작용을 했다. 이는 이 가문을 왕실 외척으로 격상시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집안과 연계된 또 다른 가문까지도 왕실 외척으로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김은부열전은 김은부가 1017년에 세상을 떠나자 현종이 김은부 부부, 김은부의 부모, 김은부의 장인을 높이 추존했다고 알려준다. 김은부의 장인인 이허겸은 소성현 개국후(邵城縣 開國侯)로 책봉됐다. 봉건 제후 비슷한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소성현은 지금의 인천에 있었다. 이곳은 인천 이씨(경원 이씨, 인주 이씨)의 본거지다. 이 가문이 전국적인 명문가로 일어선 계기는 이허겸에 있었다. 그가 봉건제후 비슷한 지위를 갖게 된 것이 출발점이었다.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에 관한 <고려사> 이자연 열전은 이허겸이 그런 지위를 갖게 된 것을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이씨 가문의 역사를 서술했다. 옷 선물을 계기로 김은부의 가문이 왕후족이 된 것이 김은부의 처가인 인천 이씨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자연의 세 딸은 제11대 문종에게 시집갔다. 이자연의 손자인 이호의 딸은 제12대 순종에게 시집갔다. 이호의 손녀인 이자겸의 딸들은 제16대 예종 및 제17대 인종에게 시집갔다. 김은부 집안의 옷 선물이 이허겸의 지위를 높이고 이것이 이씨 가문을 왕실 외척으로 만드는 작용을 했던 것이다.
고려 인종 때 절정에 달한 이씨 가문의 권세는 현대 한국인들이 익히 아는 사건인 이자겸의 난(1126)과 관련이 있다. 이자겸은 절정의 권세를 이용해 인종을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되려 했다. 극도로 억압된 인종이 왕권을 넘긴다는 조서까지 작성했을 정도다. 1126년에 인종이 이자겸 정권을 무너트리지 못했다면, 고려는 건국 200년 만에 문을 닫았을 수도 있다.
이자겸 사건과 긴밀히 연관된 것이 묘청의 난이다. 이자겸을 몰아내고 기득권층에게 불안감을 느끼던 인종의 심리 상태를 1128년부터 움직인 쪽이 묘청 세력이다. 이들은 서경(평양)으로 천도하자고 인종에게 권유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1136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됐다.
이자겸의 난은 이허겸의 지위 상승을 발판으로 이씨 가문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벌어졌다. 묘청의 난은 이자겸 집안이 몰락한 뒤의 정치적 진공 속에서 발생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이허겸의 지위가 높아지는 원인이 된 김은부의 옷 로비가 역사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연쇄적으로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옷 한 벌 제대로 갈아입기 힘들 정도의 곤경에 빠진 현종을 도운 1011년의 옷 선물이 김은부 가문과 이허겸 가문을 왕실 외척으로 만들고 이것이 이자겸의 난(1126)과 묘청의 난((1136)이 발생하는 데도 연쇄 작용을 끼쳤다. 그 어의에 들어간 실 한 줄을 뽑아내면, 이처럼 고려사를 뒤흔드는 단서들이 줄줄이 뽑혀 나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