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국제평화영화제' 김동호-이두용2020년 평창국제영화제 참석한 당시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과 이두용 감독(오른쪽).
이정민
한국영화의 액션영화의 대가였던 이두용 감독이 19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1942년생인 이두용 감독은 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선구자였으나 검열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제약되는 현실 속에서 사극을 통해 영화세계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외적 주목을 받기도 한 한국영화의 대표적 감독 중 하나였다. 연출작이 63편이고 각본과 각색, 제작자로 나선 영화까지 포함하면 필모그라피가 103편에 달한다.
이두용 감독의 영화인생은 학창시절 <원탁의 기사>(리차드 소프,1953), <쿼바디스>(머빈 르로이,1951), <십계>(시셀 B. 드밀,1956), <애수>(머빈 르로이,1940), <녹원의 천사>(클래런스 브라운,1944) 등 할리우드 영화에 빠져 지낸 게 계기가 됐다. 고인은 생전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청파동 일대의 학교나 효창운동장에 설치되는 가설극장 같은 곳에 부모나 누나를 따라가서 <검사와 여선생> <며느리의 설움>같이 변사가 해설하는 무성영화들을 보곤 했다"며 "웃고 울리는 변사의 입담과 활동사진이 아주 재미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대학 다니는 학교 선배가 영화 조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너는 그림을 잘 그리니 나중에 영화감독 하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그를 만날 일이 있어 만리동 촬영소에 갔는데 그는 대뜸 자기가 쓰고 있던 기록판을 건네주며 자기가 하라는 대로 기록하라고 해 스크립터 일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하다 보니 대학 진학은 나중으로 미뤄지고 그 일에 빠져들게 됐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조감독이었던 선배가 영화를 배우지 않겠냐고 제안해 영화판에 뛰어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스크립터를 거쳐 조감독으로 연출 수업을 쌓고서, 1970년 멜로드라마인 <잃어버린 면사포>로 감독 데뷔한다. 초기에는 데뷔작과 같은 멜로드라마를 몇 편 작업한 뒤,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해외에도 팔릴 수 있는 영화장르를 고민하다가 액션영화를 생각해냈다. 그 후 1974년 <용호대련>을 시작으로 일련의 태권도 영화들을 연출했다.
이두용 감독은 좁은 우리나라 내수 시장만 바라보고 한탄할 게 아니라, 우리 영화를 해외에 진출시켜 돈을 벌어들여 국산영화에 투자해야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생각을 한 것이었는데, 이건 단순한 애국심이나 낙후돼 있는 우리 영화산업을 위한 기특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한, 내 영화를 살찌게 하기 위한 절실한 소망이었다. 그 실천으로서 각 나라의 언어와 풍습이 달라도 이해하기 쉬운 액션물을 떠올렸던 것이었다.
일반적인 액션영화는 할리우드가 너무 잘 만들었기에 그들이 잘 모르는 색다른 액션영화를 만들어 외국인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고민 속에 전략적으로, '발'을 쓰는 태권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1974년 한 해에만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분노의 왼발> <속 돌아온 외다리> <배신자> 등 6편의 태권도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언론이나 영화계에선 그들을 연기자 취급하지 않고 '으악새 배우'로 부르고, 이두용 감독을 향해 '으악새 영화'(조연 액션 배우들이 '으악'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는 영화) 전문 감독이라며 당시의 액션 영화를 낮춰 불렀다.
검열에 시달려 사극 선택했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