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해경
민해경 제공
그녀의 약속 지키기는 철두철미하다. 어떤 약속을 어떻게 했건 한번 내뱉은 약속에 임하는 그녀의 자세는 약속을 잘 못 지키며 또 약속하기를 싫어하는 나의 입장에선 신기할 정도였다. 약속 지키기는 그녀의 인생철학이었던 것 같다.
TV 음악프로그램은 본 녹화가 오후 6~7시인데도 사전의 복잡한 조명 콘티라든지 무대 콘티, 카메라 리허설 등 때문에 방송국에선 오전 10시, 11시쯤 출연자들을 오게 만든다. 그럴 때 기성 인기가수는 물론 신인가수도 거의 30분~40분 쯤 늦게 매니저를 앞세워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는 방송국과의 약속시간 20분~30분 전, 아무도 없는 녹화스튜디오에 나타난다. 화장도 안 한 얼굴로 녹화 스튜디오 한쪽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헤드폰을 끼고 그날 노래할 음악들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카메라 감독, 무대 감독, 조명 감독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이 출연할 프로그램의 스태프와 PD를 그렇게 맞아들이는 가수는 그녀뿐이리라.
프로페셔널한 그녀의 근성과 끊고 맺음이 분명한 생활신조에서 나오는 본받을 만한 일면인데, 또 다른 행사장이나 지방 방송국 출연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녀의 약속에 대한 개념을 그녀 일을 돌보고 있는 매니저들이 가끔 소홀히 여길 때가 있다. 그때 매니저들은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와 고음의 목소리에 찔리듯 혼이 나야 했다. 나는 한 번도 혼이 안 났다. 다행스럽게도 난 작곡가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유행 감각은 참으로 뛰어나다. 과감하게 자기 변신을 시도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과연 몇이나 될까. 여기서 변신이라 함은 시시각각 변해 버리는 탈바꿈이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관찰을 통해 용기 있게 실행에 옮기는 사람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처음 작곡해 준 곡이 <그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이란 댄스곡이었다. 처음 악보를 받아들고 내가 흥얼흥얼 불러주는 노래를 듣고 그녀는 별 말이 없었다. 난 "신통치 않은가?"하고 우려가 됐다. 그러면서 스스로 위로하기를 "에이 내가 뭐 댄스곡 작곡가도 아니고, 아니면 말지 "하곤 사무실을 나왔다. 사실 작곡가라고 해서 무조건 가수에게 "이거 불러!"하며 신곡을 안겨 버릴수는 없는 노릇이다.
먼저 그 노래를 부를 가수가 맘에 들어 좋아하는 모습을 봐야만 신이 나서 다음순서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소속사 사장님이 적극 주장하는 바람에 간신히 노래키만 맞추어 일주일쯤 후, 그 노래의 반주 녹음을 끝내고 그녀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또 역시 시큰둥,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난 약 2주일 정도 잊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곡이 마음에 든다고 팔짝팔짝 좋아하는 대신 스스로 새로운 노래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에 커다란 리본하나 메어 달고 '블랙타이거'라는 4인조 남성 백 댄싱팀을 구성해 안무를 짰다고 한다. 몰래 시험공부하는 학생처럼 새로운 댄스 비트 춤을 준비해서 대중들에게 선 보일 무대를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TV에서 싱싱한 댄스와 함께 화사하게 웃는 모습으로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을 노래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난 충격을 받았다. "어? 저거 내가 작곡한 노랜데?" 그녀는 내가 만들어준 노래에 멋진 옷을 입혀 놓았던 것이다.
그해 머리에 리본 매는 것이 소녀들 사이에서 유행이 됐고, 리본이 불티나게 팔렸다. 우리나라 전역의 댄스 클럽이나 흥겨운 모임에선 발놀림이 특이했던 그녀의 춤이 유행이 됐다.
시대를 관통한 아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