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에서 태어나고 쭉 살았다. 어릴 적엔 영호남 지역감정이 엄청났다. 정치란 것에 대해 잘 알 턱이 없었지만 단지 선거 때 반짝 불붙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적대감과 차별, 혐오가 묻어나는 건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를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한 건 1987년이었다. 어릴 적에 부모님 대신 반상회에 가면 우산이나 수건을 주면서 넌지시 선거에서 누굴 뽑아야 할지 언질이 오가던 시절이다. 당시에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에 실패해 노태우가 당선된 걸로 기억에 남은 바로 그 선거다.
 
그 다음 대선은 뭘 알지도 못하면서 하마평을 올릴 정도 나이가 되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이 노태우의 당에 들어가 김대중과 또 맞붙었고 정주영이 출마했던 선거다. 김대중은 또 졌고 이번에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1995년, 여름에 보름 정도 시골에 들어가 세상 소식 모르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터미널에서 신문과 잡지를 확인하니 두 개의 놀라운 소식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삼풍백화점 붕괴였고 다른 하나는 정치를 그만두겠다던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기존 야당에서 지지자들을 데리고나와 신당을 창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주변에 김대중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저 대통령 병에 걸린 노회한 정치인의 행보로만 여겨지던 시절이다.
 
그리고 격랑의 시간이 흘렀다. 개인적으로나 한국사회 전반적으로나 그랬다. 그리고 나라가 망했다는 IMF 구제금융 치하에서 한치 앞을 알 수 없던 때 또다시 출마한 김대중은 마침내 1971년 대선까지 포함해 4번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은퇴선언을 번복하고 자신이 만든 정당을 깨고 신당을 창당했으며, 그가 맞서 싸우던 불구대천의 원수 군부독재 세력과 손을 잡고 DJP(T)연합을 구축해 이룩한 성과였다.

그렇게 대통령이 되고 5년간의 임기 동안 바람 잘 날 없었지만 임기를 마쳤고 정권연장에도 성공했다. 김대중이 현역 정치인이던 시절 주변에선 늘 그를 욕했으나 극히 일부에선 그를 하나의 희망이자 대안으로 숨죽여 언급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표면적으로는 그를 크게 비난하거나 욕하는 이는 줄어들었긴 했었다.
 
왜 우리는 김대중이란 정치인을 그렇게 미워했을까
 
"길위에 김대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길위에 김대중"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명필름, 시네마6411
 
경상도 마초 특징은 늘 정치 이야기를 술자리 안주처럼 늘어놓지만 정작 합리적 정치의식이나 판단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좋게 말하는 이들은 정과 의리가 두텁다 하지만 비판하는 이들은 자신과는 별 관련도 없는 기득권층에 대한 기이한 동질감, 마치 지지하는 이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자가당착이라 간주해버리곤 한다. 경상도 뿐만은 아닐 테지만 지역감정 관련해선 늘 진저리날 정도로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전라도와는 상종하지 말라는,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하는 진위 여부는 확인 불가능한 체험담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게 김대중은 오랫동안 누구나 씹어대기 안성맞춤인 비호감 정치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숱하게 호명되었지만 대개 부정적인 호명에 동원되었다. 정치병 혹은 대통령병 환자라는 건 양반이었고 호남에 대한 혐오와 반감의 의인화 상징과 같았다. 어렵지 않게 '빨갱이'라는 표현이 따라붙었다. 그 시절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빨갱이'의 아이콘과 같던 김대중의 언행은 그렇게 과격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주위에선 참 끈질기게 그에게 부과된 낙인을 당연시했다. 본색을 숨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기이한 일이었다.
 
김대중은 2009년에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정치적인 표상은 그보다 몇 달 일찍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던 노무현에게로 옮겨졌다. 김대중에 대한 원색적 비난은 대통령 임기 이후 상당히 줄어들었고 죽은 이에 대한 욕설은 터부시되는 미풍양속 덕분에 이제 표면적으로 매도하는 이는 쉽게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그와 비례하듯 관심과 기억도 정치권이나 그의 영욕을 동시대에 겪었던 세대 외에는 감소 일로를 겪었다. 어쩌면 이제 '역사 인물'이 되었기에 비로소 편견 없이 사후적 평가를 해볼 시간이 도래한 셈이다.
 
그리고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김대중의 이름을 자주 언급했지만 정작 인간 김대중에 대해 그렇게 아는 게 없었다는 것을. 2024년, 김대중 탄생 100주년에 맞춰 완성된 민환기 감독의 <길위에 김대중>은 필자와 같은 이들에겐 그 시절에 대한 복기를, 과거형으로만 그를 접했던 이들에겐 이미지로 보는 평전 형태로 기능할 작업이다.
 
정치인 김대중의 기원을 찾아서
 
"길위에 김대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길위에 김대중"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전민조
 
영화는 김대중의 1924년 출생부터 1987년 대선 직전까지의 생애를 갈무리한다. 연표로는 접했을지 모르지만 당시엔 다수의 극단적 혐오와 소수의 열광적 찬양이라는 주변 분위기 때문에 그 객관적 분석과 평가보다는 (편견에 가까운) 선입견에 가려져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다. 당시엔 '김대중=광주'이다 보니 필자는 그가 광주, 혹은 목포 출신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남해의 작은 섬 하의도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도 새삼 확인했다. 1924년생이니 일제강점기에 유-청소년기를 보낸 건 당연지사였고 징병 직전에 일제가 패망한 덕분에 패색 짙은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가는 걸 면했다는 것, 해방전후에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그것보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언론인이었다는 건 인식의 바깥에 있었던 내용이다.
 
한국전쟁 동안에 기업을 운영했다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처형될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이후 이승만의 실정에 실망해 본격적으로 성공한 사업가에서 오랜 무명 정치인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도. 정치적으로 숙명의 라이벌이지만 오랜 기간 동지이기도 했던 김영삼이 여전히 깨어지지 않고 있는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기록을 보유하던 시절에 그는 거의 10년간 낙선을 거듭하며 일찍 성공했던 재산을 다 까먹고 뒷바라지를 하던 첫 번째 아내를 병환으로 잃는 등 정치낭인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야당의 주요 정치가들이 학벌과 유학 등으로 쌓아올린 네트워크 바깥에서 절치부심해가며 정책통이자 연설가로서 자신을 단련한 과정이 조명된다. 그리고 그의 첫 당선 지역구가 강원도 인제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렇게 김대중에 대해 아는 게 없었구나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5.16 쿠데타 이후 야당의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정작 김대중의 포지션은 그에게 덧씌워진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한일협약 찬반논쟁부터 1971년 대선 당시 그가 펼쳤던 주요 정책 지향은 그저 역사책에 기록된 것과는 전혀 다른 체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런 정책의 확고함과 시민대중과의 능수능란한 접촉면 때문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합리적으로 보이던 당시의 김대중을 군부정권이 더 위협적으로 느꼈겠구나 하는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진 않았다.
 
개인의 생사와 민주주의의 운명
 
"길위에 김대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길위에 김대중"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명필름, 시네마6411
 
그리고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2002년 영화 < KT >의 배경이 된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과 오랜 가택연금, 그에 굴하지 않던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시간이 차례로 흘러간다. 그리고 박정희 암살 이후 '서울의 봄' 당시 급박한 정세 속에서 내란음모사건의 누명을 쓰고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접한 뒤 사형선고에 이르는 과정은 김대중 개인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그저 화면을 쳐다보고만 있기 힘든 고통과 좌절의 찰나로 다가온다. 특히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투옥되어 바로 옆방에서 정치적 동지들은 물론 애꿎은 대학생,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까지 고문에 시달리는 걸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자신의 무력감은 마음의 병이 되었을 터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몇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된 광주의 학살이 억울하게 투옥된 본인의 구명요구를 주요 요구로 내걸다 희생당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독재정권이 제안한 망명 기회에 대한 고뇌의 시간이 이어진다.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생사의 고비를 겪어가며 일종의 '소명'을 지니게 된 김대중의 미국 망명기간 활동상과 귀국 후 또다시 이어진 감시 및 연금 상황에서도 치열하게 이어진 정치투쟁 과정은 첩보 스릴러나 무협지를 보듯 흥미진진한 역사의 한 장면 자체일 테다. 우리가 어느새 잊어버린 반 독재투쟁과 함께 한국을 넘어 미국과 3세계 민주화 투쟁의 상관관계나 국제적인 연대운동이 자연스럽게 소환되는 건 덤이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로 펼쳐진 민주화 상황이 찾아온다. 하지만 영광의 시간과 함께 수면 아래 잠복했던 평생의 대결이 극한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어려울 땐 둘 중 하나가 빠졌다면 역사가 어찌되었을 지 알 수 없었던 양김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대선 출마의 결단이 다가오던 때, 1971년 첫 대선후보 이후 16년 만에 찾은, 1980년 5월 이후엔 본인과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린 광주 방문의 순간에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과감히 역사인물 영상평전에 도전하다
 
"길위에 김대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길위에 김대중"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명필름, 시네마6411
 
민환기 감독은 국내 독립다큐멘터리 계에서 독특한 지점을 점해왔다. 감독은 사회운동 혹은 사회적 소수자와 연대하는 '액티비즘' 지향의 독립다큐멘터리 주류에선 한발 떨어져 있었고, 그렇다고 인간극장 유형에서 변주되는, 방송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휴먼 다큐멘터리와도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상업적으로 먹힐 법한 신파나 자극적 소재를 찾아 헤매는 유형도 아니었다. 대신에 감독은 오히려 국내에선 보기 드물지만 해외에선 작가주의 경향으로 일정한 흐름을 이룬 '관찰영화'의 기반에서 꾸준히 작업해 왔었다.
 
그러던 감독이 어느 순간부터 현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기록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크게는 두 갈래다. 감독의 청장년 시절 동시기의 상징적 정치인에 대한 기록, 그리고 청년세대의 정치도전에 대한 관찰 스케치다. 후자는 감독이 꾸준히 선보여 왔던 관찰영화의 대상을 정치인과 그의 활동으로 옮긴 형식을 취한다. 녹색당 제주도지사 선거운동 과정을 담은 <청춘 선거>가 동시대 정치에 대한 실시간 관찰결과라면 고(故) 노회잔 의원의 여정을 담아낸 <노회찬6411>은 상징적 인물의 삶을 통해 단순한 전기적 기록이 아닌, (감독 본인을 포함한) 세대적 기억의 갈무리로 기능한다. 그나마 최근까지 실재했던 고인의 기억이 동시대적으로 있기에 상대적으로 난이도는 줄었을지라도 기존의 방식과는 차별화된 작업에 대한 도전일 테다.
 
<길위에 김대중> 역시 그 갈무리의 거대한 일부일 것이다. 내레이션은 배우 장현성이 담당하지만 그런 규정적 판단 때문에 필자의 귀에는 마치 감독이 자신의 정리와 입장을 관객에게 들려주는 것 같았다. 김대중의 삶과 행적에 대해 충분히 존중하며 경외심을 기반에 두고 작업했지만, 그의 일평생 정치적 행보 가운데 감독은 물론 그와 시대를 함께 보냈던 이들이 품을 수밖에 없는 애증, 혹은 의문에 대해 꾹꾹 눌러 담은 질문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김대중이 당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김영삼, 그리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어깨에 짊어져야 했던 것처럼 감독 역시 김대중을 기억하는 이들의 어떤 '질문'과 '고민'을 지게에 싣고 언덕길을 오르는 것처럼 도전하는 듯하다.
 
거인의 삶을 재료로 흥미로운 실험을 덧붙이다
 
"길위에 김대중"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길위에 김대중"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명필름, 시네마6411
 
민주화 운동가이자 시대정신의 총아로서 김대중에 대한 조명과 해석은 그가 고인이 되고 10여 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선 (극우적 정치관을 가진 이들을 제외한다면) 크게 무리랄 것 없이 소통 가능한 지점일 테다. 하지만 1980년 이후 그의 정치가로서의 행보, 특히 1987년 대선으로 가는 길에서 그가 보여준 선택에 대한 질문은 굳이 명확한 음성언어 혹은 자막의 각인 없이도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어렵지 않게 전달받을 지점이리라.
 
그렇게 '평전' 형태로 작업된 <길위에 김대중>은 동시대 인물에 대한 관찰영화 작업으로 기억되던 감독의 작업 중에서 확연히 과거형 주인공을 다루는 도전이기도 하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진과 기록을 활용한 아카이브 푸티지 영상에 채록되어 남아 있는 인터뷰 영상과 음성기록을 적절히 삽입해 김대중의 장구한 생애 전반을 재구성한다. 하지만 그저 나열하는 데 그치진 않는다. 아무래도 지금에 비해 부실한 상황일 수밖에 없는 푸티지 상태를 오히려 역이용해 정치인 김대중이 매 상황마다 고뇌에 찬 결심으로 결정한 판단에 대한 사후 평가를 묵언으로 표현하거나 물음표를 새겨 넣는 식으로 적극 활용한다.
 
특별히 의도적으로 지글거리는 푸티지 영상들은 (유신 치하 납치나 5공 시절 사형선고 전후 같은) 생사의 기로에서 제한된 정보와 강압 속에서 결단해야 했지만, 과연 그 결정이 최선이었는지 의문부호가 누군가에겐 떠오를 수밖에 없는 장면들에 절묘하게 맞춰진다.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군사독재를 연장시킨 5공 정권이 3S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출범시킨 프로야구에서 해태 타이거즈가 삼성 라이온스를 거듭 격파하며 우승하는 순간에 운동장을 가득 메운 관중이 '김대중!'을 연호하는 사운드 효과는 광주와 김대중의 기나긴 숙명적 인연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든다.
 
<길위에 김대중> 2부를 기다리며
 
누군가에겐 <길위에 김대중>이 그저 원래 비호감을 넘어 혐오의 총합 같았던 거물 정치인의 전기영화에 불과할 테다. 그런 비합리적 감정 있지 않은가. 한 번 미우면 주는 거 없이 끝까지 미운 대상. 김대중은 한국의 정치인 중에서 가장 억울하게 그런 편견의 대상이 되었던 존재다. 하지만 감독은 본인이 청년시절부터 쭉 지켜봐왔던, 지극한 오해와 혐오에 시달리면서도 목숨을 걸고 목표를 향해 정진했고 그 과정이 하나의 시대정신과 조응했던 '거인'을 일방적으로 추종하기를 거부한 채 흥미로운 지도의 중심축으로 재구성해낸다.
 
누군가는 이제 곧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끓어오르는 정치인 팬클럽의 전성시대와 당시 김영삼이나 김대중 같은 거물 정치인들을 향한 지지 열풍이 무슨 변별점이 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거인'들은 찬반양론을 떠나 어떤 '시대정신'의 구현 혹은 '변화'의 상징으로서 정치가 개인과 거대한 집단적 열망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게 만들던 존재들이다. 지금 여야 정치인들 가운데 그런 시대정신을 올곧게 펼치고 전망을 제출하는 이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길위에 김대중>은 3부작으로 기획된 김대중 시리즈의 첫 번째로 기능한다. 두 번째 작업은 현재 다른 감독에 의해 한창 작업 중이라 한다. 2탄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중심으로 다룬다고 하는데 김대중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자 세속적 성공의 시간을 어떻게 다룰지, 별도의 '실용적' 의도를 가미했는지가 궁금한 대목이다. 하지만 2탄보다는 민환기 감독이 다시 도전할 3탄이 더 기다려지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

감독은 물론 필자를 포함해 김대중이라는 '거인'과 동시대에 호흡했던 이들이 돌아보는 지난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시간은 아직 미완으로 머물러 있고, 잠깐의 휴식 겸 김대중의 '길'을 되새겨 다음 진로를 모색하는 게 한 번의 선거결과 일희일비보다 몇 십 배는 더 가치 있어 보이기 때문일 테다.
 
<작품정보>
 
길위에 김대중
2023|한국|다큐멘터리
2024.01.10. 개봉|126분|12세 관람가
감독 민환기
출연 김대중
내레이터 장현성
제작 명필름, 시네마6411
제공 명필름, 아이오케이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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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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