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어지는 땅>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이어지는 땅>은 전통적인 기승전결 서사를 대입해 보게 된다면 당혹스러움이 앞설 법한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되면 잘 정돈된 공원의 원경이 펼쳐진다. 풍경이 근사하다. 그 화면을 지켜보고 있자니 저 끝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온다. 주인공이겠거니 하고 호기심 속에 점점 뚜렷해지는 윤곽을 지켜본다. 하지만 그 정체를 확인하고 나니 좀 당황스럽다. 그는 그저 공원을 산책하는 동네 주민일 뿐이다. 그 다음 두 번째로 화면에 등장하는 이 또한 그렇다. 좀 맥이 빠지는 상황이 되고 나서야 진짜로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 주인공 호림의 행보는 초반에는 그저 근래 한국독립영화에서 숱하게 양산되는 자기연민 가득한 캐릭터에 불과해 보인다. 런던까지 대학원 유학을 왔다는데 그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전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스토커같은 집착만 보인다. 헤어진 지 2년 넘게 지난, 그것도 전 애인과의 대화를 들어보니 자신의 귀책사유로 결별한 것으로 보이는데도 그는 미련을 보이며 집착한다. 짜증이 날 법한데도 꾹 참고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동환의 권유와 (이미 눈치를 챘을 게 뻔한) 현 애인 경서의 관대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호림은 맹목적이다.
솔직히 이쯤 되면 민폐 캐릭터로 보이기도 한다. 기성세대 시각으로 보자면 '사회성'은 결여된 채 자기중심적으로 주변에서 배려받기만 원하는, '요즘 세대'의 부정적인 모범사례 같은 꼴이다. 자기 기분에 따라 주변 사정이나 공적 역할은 외면하고 일이 커지면 숨어버리는 태도를 보면 동 세대라도 정이 뚝 떨어질 법하다. 다행히 호림은 결정적 파국까지는 치닫지 않은 채 자리를 뜬다. 이 순간에도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챈 것인지 생면부지로 오늘 처음 만난 이에게 챙김을 받는다.
하지만 작은 반전이 하나 숨어 있다. 호림이 공원에서 동환을 만나기 전 우연히 집어든 캠코더 속에 감춰진 사연이다. 이원은 캠코더에 얽힌 사연을 호림에게 들려주지만 자신은 도저히 그 영상을 확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둘은 그렇게 터널을 통과하고, 카메라는 그들의 뒷모습을 비춘다. 터널을 지나자 화면에는 이원의 근 미래가 떠오른다. 관객은 이제 그의 과거가 밝혀질 것이라 기대할지 모르지만, 영화는 그 보물 상자를 열 계획이 없다. 이제 이원의 현재 일상이 조명된다. 그는 밀라노로 돌아와 본업에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하지만 미래는 열려 있는 법이다. 열심히 산책을 하다 이원은 새로운 인연과 만나게 된다. 물론 순조롭지만은 않다.
'코스모폴리탄' 세대의 정서가 과감한 형식실험으로 구현되다
<이어지는 땅>은 거의 정확히 이등분된 분할 구성을 취한다. 전반부는 런던에서 호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후반부는 밀라노에서 이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로 구성되는데 두 주인공이 함께 밤길을 걷던 터널이 바통 터치 구간처럼 활용된다. 특별히 필터 효과를 넣지 않은 자연주의적 화면 사이에 터널 장면을 포함한 몇몇 순간은 의도적으로 표현된 빈티지한 질감을 통해 LP 음질처럼 스크래치 처리된 MP3, 혹은 낡은 필름이나 오래된 사진첩의 기운을 이식한다. 꾹꾹 눌러 담은 인장처럼 해당 장면들의 의미와 사용처를 감안하며 본다면 전반적으로 느리게 관조적으로 흘러가는 전개에 색다른 추가가 이뤄질 테다.
화림과 이원은 과거에 얽매인 채 정체된 자아를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길을 걸으며 전진해 다른 고지에 오르는 과정으로 이끄는 둘이되 하나와 같은 캐릭터로 기능한다. 거의 완벽히 전반부와 후반부를 분할해 분량을 점유하는 둘이지만 화림이 딱 한번 후반부에 등장하는데, 해당 장면에서 그가 독백하듯 관객에게 들려주는 대사를 통해 그런 캐릭터성이 확인되는 셈이다.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이국의 낯선 거리를 거닌다. 그들이 이동하는 동선 자체에 큰 의미나 명확한 목적지는 없어 보인다. 설령 명목상 존재하더라도 도착보다는 걷는 과정 자체가 무게감을 지니는 편이다. 카메라는 등장인물들의 표정을 자세히 잡기보다는 먼발치에서 그들의 움직임 자체를 조명하는 데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움직임의 동적 패턴이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표현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취하는 방법론처럼) 인물과 사건에 주목한다면 무척 '정적'으로 보일 영화는 움직임에 주목하는 순간 '동적' 흐름으로 기이한 변화를 거친다.
세대 담론으로 <이어지는 땅>을 조망한다면 몇 가지 흥미로운 변화를 목격할 수 있다. 우선 '한국이 싫어서'까지는 아니라도 굳이 한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이 땅에 묶일 생각 같은 건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에게 맞는 곳, 혹은 지금 그들이 취하고 싶은 행태에 따라 머물 장소를 정할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런던과 밀라노라는, 국내파들에게는 한번쯤 여행 혹은 이민의 대상으로 동경할법한 장소를 배경으로 삼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엔 아주 무심하게 해당 지역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저 상황과 조건에 맞춰 머무는 장소일 뿐이라는 영화 속 인물들의 심경을 대변하듯 말이다. <국제시장> 같은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와 이 영화 속 세대의 정서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 새로운 세대의 정체성이 영화 곳곳에 묻어난다.
문제는 다른 토양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는 교훈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