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KBS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의 원정왕후(이시아 분)는 현종(김동준 분)의 동반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궐 밖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다가 갑자기 임금이 된 현종이 군왕의 위신을 갖추도록 도와준다. 현종이 현실보다는 이상에 치우치는 듯하면 정중하게 현실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현재까지의 이 드라마 방영분에서는 원정왕후가 현종의 배우자로 부각돼 있다. 등장인물 소개란에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딸인 원성(하승리 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원성황후도 조만간 어느 정도 조명될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거란전쟁>은 거란족 요나라와의 전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이 드라마에서는 현종의 배우자들이 충분히 조명되기 힘들다. 만약. 거기에 초점을 맞춘 사극이 나오다면, 그런 드라마는 고려판 '여인천하'가 될 수도 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살았던 조선 성종시대,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살았던 숙종시대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 고려 현종시대다.
 
조선시대에는 중전이 왕후로도 불리고 왕비로도 불렸다. 임금의 정실부인이 후(后)로도 지칭되고 비(妃)로도 지칭됐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중전이 '후'로 불렸다. '비'는 그보다 낮은 단계였다.
 
<고려사> 후비열전은 "정실은 왕후로 부르고 첩은 부인으로 부른다"라며 "귀비·숙비·덕비·현비는 부인으로 삼으며 품계는 모두 정1품이다"라고 기술했다. 현대 한국인들은 배우자를 부인으로 부르지만, 고려시대에는 부인이 임금의 첩이었다. '비'는 후궁인 '부인'에 해당했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몽골이 우리나라에 간섭할 때 우리의 악부(樂府)나 역사책에서 황도(皇都)니 제경(帝京)이니 해동천자니 하는 표현들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사실이 <고려사>에 나타난다"며 안타까워했다. 개경을 황제의 도읍이나 황제의 경성 등으로 부르던 황제국 고려(918~1392)의 위상이 13세기 후반에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부터 실추됐던 것이다.
 
그 뒤 조선왕조는 중전을 후궁 급인 '비'로 불렀다. 그러면서도 '후'를 병용했다. 일례로, 세종은 배우자인 심씨가 죽자 소헌왕후라는 시호를 부여했다. 중국의 눈치를 살피며 '비'를 사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주적 면모를 과시하고자 '후'를 썼던 것이다. 이런 조선과 달리, 몽골 간섭 이전의 고려는 정실 배우자를 '후'로, 후궁을 '비'로 구분함으로써 황제국의 면모를 유지했다.
 
출신이 다채로운 13명의 배우자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KBS
 
<고려사> 후비열전에는 현종의 배우자가 총 13명 등장한다. 이 중에서 '후'는 원정왕후를 비롯한 7명이다. 나머지 6명 중 셋은 '비'로 불리고 셋은 그냥 '궁인'으로 불렸다.
 
일곱 명의 '후' 중에는 사후에 왕후로 추존된 이들이 있다. 김은부의 딸이자 원성왕후의 자매인 원혜왕후(원혜태후)는 죽은 뒤에 '후'로 격상됐다. 원목왕후 서씨도 사망 당시에는 흥성궁비였다. 김은부의 또 다른 딸인 원평왕후도 사후에 추존됐을 가능성이 있다.
 
현종시대도 여인천하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은 '후'가 많아서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들의 '출신성분'이 다채롭기 때문에 그런 소재가 되고도 남는다.
 
<고려거란전쟁>에 나오는 원정왕후는 현종의 제1왕후다. 그는 현종의 4촌인 성종의 딸이다. 원정왕후와 현종은 5촌간이다. 왕건의 증손녀인 이 여성은 왕씨 성을 쓰지 않고 어머니 성인 김씨를 썼다.
 
제2왕후인 원화왕후 최씨도 성종의 딸이다. 원정왕후와 원화왕후는 이복자매다. 원화왕후도 아버지 성이 아닌 후궁 어머니의 성을 썼다. 제5왕후인 원용왕후 유씨는 성종의 조카다. 그 역시 현종의 5촌이다.
 
원정왕후·원화왕후·원용왕후의 존재는 현종이 신라와 고려 초기의 왕실 근친혼 풍습에 따라 혼인했음을 반영한다. 그런데 제6왕후인 원목왕후 서씨 등은 또 다른 결혼 메커니즘을 반영한다. 원목왕후 등의 결혼은 왕실과 유력 가문의 정략혼 성격을 많이 띤다.
 
원목왕후가 서씨 성을 쓴 것은 어머니나 할머니가 서씨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강동 6주 획득으로 유명한 서희다. 외교관 서희가 활약한 제1차 여요전쟁은 현종이 등극하기 16년 전인 993년의 일이다. 서씨 집안이 큰 공을 세운 뒤에 원목왕후가 현종과 혼인했던 것이다. 이는 제1차 거란족 침공이 고려 사회에 큰 충격이 됐고 이 침공을 막은 서씨 가문이 영향력을 갖게 됐음을 반영한다.
 
현종의 부인들이 다함께 한자리에 모여 저마다 친정집 이야기를 할 경우, 이런 자리에서 가장 많이 나올 만한 이야기는 제2차 여요전쟁과 얽힌 사연이다. 현종이 겪은 제2차 전쟁의 실상을 생생히 증언해줄 배우자가 셋이나 있었다. 원성왕후·원혜왕후·원평왕후가 그들이다. 이 셋은 모두 자매다.
 
김은부의 딸이 셋이나 왕후가 된 것은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침공한 제2차 전쟁의 결과다. <고려사> 원성태후열전은 1010년에 발발한 이 전쟁으로 인해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한 일을 언급하면서 이런 사연을 들려준다.
 
"애초에 현종이 남쪽으로 거둥한 뒤 적이 물러나자 돌아오다가 공주에 이르렀다. 은부가 그때 절도사였다. 왕후에게 어의를 만들어 바치게 하니, 이 때문에 그를 맞아들여 연경원주(延慶院主)로 칭하게 됐다."
 
개경으로 귀환하던 현종이 공주절도사 김은부를 만나게 되고 김은부가 딸에게 어의를 만들도록 한 것이 인연이 됐다는 설명이다. 처음에는 후궁인 연경원주에 책봉됐다고 했다. 왕후가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위 인용문에서 '남쪽으로 거둥'에 해당하는 원문은 남행(南幸)이다. 다행스러움이나 기쁨을 뜻할 때 쓰이는 행(幸)이 군주의 피난을 가리킬 때도 사용됐다. '행'은 임금의 피난을 듣기 좋게 표현해주는 용어였지만, 원성왕후 입장에서는 그것이 또 다른 의미의 '행'이 됐을 수도 있다. 임금의 피난을 계기로 후궁이 되고 왕후가 됐으니 그에게는 그것이 '행운'으로 인식됐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의 '행'은 원성왕후의 두 동생에게도 적용된다. 원혜왕후와 원평왕후도 언니를 뒤이어 궁에 들어갔다. 축구하다가 옷이 찢어진 김춘추의 의복을 수선해준 김문희가 김춘추와 결혼해 문명왕후가 된 데 이어 언니인 김보희가 후궁이 된 일을 연상케 하는 사례다.
 
원정왕후·원화왕후·원용왕후는 전통적인 왕실 근친혼의 결과로 배우자가 됐다. 원목왕후는 제1차 여요전쟁 때 공을 세운 서희의 손녀다. 원성왕후·원혜왕후·원평왕후는 제2차 여요전쟁 때 현종에게 친절을 베푼 가문의 일원들이다.
 
두 전쟁을 계기로 결혼한 여성들은 일종의 정략결혼 당사자들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현종의 배우자 구성은 왕실 근친혼과 정략결혼을 고루 반영하는 한편, 두 차례의 고려거란전쟁도 함께 반영한다.
 
제3차 여요전쟁의 일등공신인 강감찬 가문의 여성까지 들어갔다면, 더욱 이채로워졌을 것이다. 근친혼과 정략혼의 당사자도 있고 두 차례 여요전쟁의 관련자들도 있었으므로, 이 시대의 왕실 여성들을 소재로 문학작품을 쓴다면 고려시대판 여인천하가 나올 여지가 충분하다.
 
'왕족이 당연히 군주의 배우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성들과 '왕후장상의 씨앗이 따로 있겠느냐'고 생각했을 여성들이 현종의 배우자로 살았다. '우리 할아버지 서희가 아니었다면 고려는 망했을 것'이라고 자부했을 수도 있는 여성과 '우리 아버지와 큰언니가 아니었다면 임금의 귀환길이 더 힘들었을 것'이라고 자부했을 수도 있는 여성들이 현종의 배우자로 살았다. 조선 성종이나 숙종 때 못지않은 다채로운 장면들이 많이 나올 법한 여인천하의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고려거란전쟁 여요전쟁 근친혼 정략결혼 고려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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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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