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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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의 원정왕후(이시아 분)는 현종(김동준 분)의 동반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궐 밖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다가 갑자기 임금이 된 현종이 군왕의 위신을 갖추도록 도와준다. 현종이 현실보다는 이상에 치우치는 듯하면 정중하게 현실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현재까지의 이 드라마 방영분에서는 원정왕후가 현종의 배우자로 부각돼 있다. 등장인물 소개란에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딸인 원성(하승리 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원성황후도 조만간 어느 정도 조명될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거란전쟁>은 거란족 요나라와의 전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이 드라마에서는 현종의 배우자들이 충분히 조명되기 힘들다. 만약. 거기에 초점을 맞춘 사극이 나오다면, 그런 드라마는 고려판 '여인천하'가 될 수도 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살았던 조선 성종시대,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살았던 숙종시대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 고려 현종시대다.
조선시대에는 중전이 왕후로도 불리고 왕비로도 불렸다. 임금의 정실부인이 후(后)로도 지칭되고 비(妃)로도 지칭됐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중전이 '후'로 불렸다. '비'는 그보다 낮은 단계였다.
<고려사> 후비열전은 "정실은 왕후로 부르고 첩은 부인으로 부른다"라며 "귀비·숙비·덕비·현비는 부인으로 삼으며 품계는 모두 정1품이다"라고 기술했다. 현대 한국인들은 배우자를 부인으로 부르지만, 고려시대에는 부인이 임금의 첩이었다. '비'는 후궁인 '부인'에 해당했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몽골이 우리나라에 간섭할 때 우리의 악부(樂府)나 역사책에서 황도(皇都)니 제경(帝京)이니 해동천자니 하는 표현들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사실이 <고려사>에 나타난다"며 안타까워했다. 개경을 황제의 도읍이나 황제의 경성 등으로 부르던 황제국 고려(918~1392)의 위상이 13세기 후반에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부터 실추됐던 것이다.
그 뒤 조선왕조는 중전을 후궁 급인 '비'로 불렀다. 그러면서도 '후'를 병용했다. 일례로, 세종은 배우자인 심씨가 죽자 소헌왕후라는 시호를 부여했다. 중국의 눈치를 살피며 '비'를 사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주적 면모를 과시하고자 '후'를 썼던 것이다. 이런 조선과 달리, 몽골 간섭 이전의 고려는 정실 배우자를 '후'로, 후궁을 '비'로 구분함으로써 황제국의 면모를 유지했다.
출신이 다채로운 13명의 배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