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를 줍다> 스틸 이미지
영화로운 형제
1999년 제3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은 하성란의 단편소설 <곰팡이꽃>이었다. 매일 새벽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안에 있는 쓰레기들을 수첩에 적은 남자가 이웃집 여자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하성란이 집중적으로 다뤘던, 자본주의 도시문화에서 소외되고 단절되고 고립된 현대인의 고독과 무력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5년이 흐른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건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2020년 장편 연출 데뷔작 <욕창>으로 고령화 시대의 이면을 예리하게 파고들어 호평을 받은 심혜정 감독이 3년 만에 두 번째 연출작 <너를 줍다>로 돌아왔다. 하성란의 <곰팡이꽃>을 원작으로 했다. 정평이 나 있는 원작의 힘을 오롯이 받아 탄탄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쓰레기로 쓰레기의 주인을 파악한다는 생각은 쉬이 하기 힘들 것이다.
한편 남의 쓰레기를 주워 상세한 신상 파악으로 나아간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엄연히 개인 정보를 취합하는 행위가 아닌가. 또한 그렇게 취합한 개인 정보로 당사자에게 다가가 관계를 형성하는 데 절대적인 도움까지 얻는 건 스토킹 범죄 행위의 소지가 있다. 물론 감독이 이런 점을 충분히 숙지하고 영화를 만들었을 테니 우리도 충분히 인지한 채 영화를 감상해야겠다.
그녀가 남의 쓰레기를 줍는 이유
극 중에서 지수는 도대체 왜 남의 쓰레기를 주워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까지 취합하려는 걸까. 아마도 오래전 연인에게서 받은 심각한 상처에서 비롯되었을 테다. 그녀는 그의 믿을 수 없는 배신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즉 그를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지수는 더 이상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자신을 지키고자 사람들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게 되었다.
최소한 동네 사람들과 일에 관련된 사람들을 속속들이 알면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지 않을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알면 모든 게 다 예측이 되니 말이다. 지수는 그 방법으로 쓰레기를 택했다. 쓰레기에는 자신도 모르게 버리는 개인 정보뿐만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파편화되어 흩어져 있다. 끼어 맞추기만 하면 거의 모든 걸 알 수 있다.
대변을 생각해 본다. 쓰레기와 더불어 인간의 삶 속에서 '더러움'을 담당하고 있는데, 들여다보면 인간 몸의 거의 모든 게 담겨 있을 것이다. 정녕 속속들이 알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더 이상 가지고 있을 필요도 이유도 없어 버려진 것들이지만. 지수는 과거 연인에게 너무나도 하찮게 버려진 자신을 쓰레기에 투영하는 걸까. 쓰레기야말로 한 인간을 파악하는 데 꼭 필요하다며 자신의 존재를 위로하는 걸까.
'진짜'를 내보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