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양육의 한계를 직시하려는 흥미로운 영화적 시도
 
누구나 어릴 적 한번쯤 '가출'의 유혹을 내심으로나마 느껴봤음직하다. 그저 뇌 내 망상 또는 실행한지도 애매할 정도의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절대다수였겠지만 말이다. 그런 시도는 대개 어른이 되고나면 그땐 그랬지 정도의 치기어린 추억담으로만 남아 있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일정기간에 걸쳐 결행했을 경우 가출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단순 경험 사례로만 남을 성격의 것도 아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야생동물이 그렇게 새끼를 지키기 위해 사나워지더라도 (DNA에 각인된) 일정 기간이 끝나면 칼 같이 단호해진다. 독립시켜야 할 때가 되어 자식들을 내보내는 순간 어린 새끼는 생사의 위기에 직면하곤 한다. 결과적으로 생물의 진화와 후손 양육은 많이 낳아서 일부라도 살아남게 하는 데에서 차츰 적게 낳지만 오랜 기간 돌봄은 물론이거니와 상당기간 축적된 정보와 집단생활을 교육하는 형태로 변모해왔다. 3억 개의 알을 낳는 개복치, 수십 개의 알을 낳지만 해변에서 바다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숱한 희생에 노출되는 바다거북의 사례는 어릴 적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종종 접했던 세대적 기억의 일부일 테다.
 
인간의 역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수렵과 채집에서 농경사회로 변화를 겪는 과정까지는 일단 자녀는 가능한 많이 낳는 게 미덕으로 간주되어 왔다. 경쟁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인구는 곧바로 노동력이자 군사력의 척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산업혁명 초기, 아동노동이 당연시되던 시절까지 거듭되었지만 이후 점점 교육수준과 지식정보 습득이 사회적으로 중시되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했다(노동현장에서 음주가 금기시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이유 역시 거의 동일하다). 현대 인류처럼 거의 20년 가깝게 자식을 부양하고 돌봐가며 독립시키는 사례는 다른 종에선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하지만 여전히 자녀 양육은 부모를 중심한 가족 책임인 것으로 규정되었다. 무가치한 식민지보다 양질의 사회구성원-노동인구 비중이 더 고평가되면서 '국민교육' 제도가 정비되었다. 맞벌이 부모를 위해 직장 혹은 정부가 최소한의 보육 및 돌봄 지원을 제공하면서 사회의 공적 책임이 일정부분 분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모의 기본책임 하에서 예외적-잔여 역할에 한정되는 실정이다. 그러나 한계에 도달한 것 아닐까 싶다.
 
전통적인 '정상가족'의 위기와 함께 여전히 사회적 양육에 대한 근본적인 재정립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 가운데 곳곳에서 위기상황이 감지되는 중이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건사고가 연일 미디어를 수놓고 우리는 혀를 차며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를 반복하지만 조금만 따져보면 현재의 사회구조 자체가 지속되기 힘겨워졌다. 저 출산이 문제라 하지만 실제로 낳아서 키우는 수고가 농경사회 적보다 현저히 증가한 상황에서 양육 문제는 딜레마에 처한 상태다. 영화 <빅슬립>은 그런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독자적 관점으로 담아내고자 한 흥미로운 시도다.
 
외톨이 청년×외톨이 소년의 옥신각신 동거일기
 
"빅슬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빅슬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도시의 외곽, 낡은 아파트단지에 살던 30대 중후반 쯤 되어 보이는 험상궂은 인상의 '기영'은 단지 현관 입구 평상에서 쪽잠을 자던 소년 '길호'를 발견한다. 인상 팍팍 구겨가며 집에 얼른 가라고 일갈하고 들어간 기영은 하지만 그곳을 떠나지 않고 배회하는 길호를 계속 목격하게 된다. 툴툴거리며 취조하듯 길호를 윽박지르던 기영이지만 딱 보니 집 나온 행색이 역력한 길호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 듯하다.
 
망설이던 기영은 단지 안 자신의 집에서 내려와 길호를 부른다. 생면부지의 꾀죄죄한 소년을 집 안으로 들인 뒤 씻으라 하고 밥을 먹인 뒤 재운다. 다음날 아침에 기영은 이제 귀가하라며 길호를 내보내고 직장인 공장으로 출근한다. 하루 일 마치고 돌아와서 보니 길호가 또 입구에 와 있다. 화를 내며 돌아가라고 일갈하지만 속정은 있는 기영인지라 길호를 또다시 집에 들이고 만다. 며칠만 당분간 머물다 돌아가라는 엄포와 함께.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는 길호는 기영의 집에서 오랜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니 딱히 떠나려는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기영은 침상에 누워서 호흡기에 의지하는 아버지의 집에 들른다. 중년의 여성이 그 집에 있지만 기영의 어머니는 아니다. 어머니는 기영의 집 베란다에 잔뜩 있는 화분만 남기고 세상을 오래 전에 떠났다. 그러니 아버지와 함께 사는 새엄마인 셈이다. 하지만 서로 불편한 관계로 보인다. 그럼에도 기영이 새엄마를 혐오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다만 굳이 살갑게 대할 생각이 없을 뿐이다. 오히려 기영의 원망은 말도 못한 채 드러누운 아버지에게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오랜만에 안식을 얻은 길호는 기영의 집에서 자기 집에서도 가질 수 없었던 편안함을 누린다. 하지만 알고 보니 길호는 홀로 집을 나온 상황이 아니다. 사실은 비슷한 처지의 '가출 팸'의 일원이지만 어떤 사연이 있어 단독행동중이다. 다른 멤버들이 길호를 찾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투박하지만 잔정을 보이기 시작한 기영과 길호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대화도 나누고 친숙해진다. 그러나 다른 가출 팸 구성원들은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으려는 길호의 행태에 의문을 품는다. 기영 또한 거칠긴 해도 불법적인 일에는 거부감이 있다 보니 공장에서 그에게 주문하는 업무에 불만이 쌓이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기영과 길호, 각자 그리고 서로를 향한 우발적 상황이 터지면서 오해와 갈등이 폭발하고 만다. 과연 둘의 관계는 이대로 파국을 맞게 되는 걸까?
 
가출청소년 묘사의 전형성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빅슬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빅슬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가출청소년을 주인공 혹은 주요 배경으로 삼는 한국독립영화는 그리 드물지 않다. 장선우 감독의 1997년 작품 <나쁜 영화>는 개봉 당시 큰 파장을 일으키며 날것 그대로의 가출 팸 풍경을 각인시켰다. 이후로 숱한 독립영화들이 해당 소재를 다뤄왔기에 어쩌면 익숙할 대로 익숙해질 법한 소재다. 근래에는 관객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진 작품으로 이환 감독의 2018년 영화 <박화영>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시대에 따라 변천사는 있지만 영화 속에서 다뤄지는 구조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이미 20여 년에 걸쳐 영상으로 묘사되어온 해당 사안이 한국사회 교육과 청소년 문제에서 해소되지 못한 채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관련 작품들은 대개 위태로운 사각지대에 놓인 가출청소년 당사자들이 직면하는 위기와 폭력을 보여주고 그 상황에서 파괴되거나 혹은 탈출하는 과정을 다루는 위주다. 현실적으로 청소년이 가출해서 좋은 꼴 볼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사실주의적 접근법에 속하는 셈이다. 가출이 아니라도 가정이 붕괴되거나 문제가 쌓이고 쌓여 '정상가족'의 범위를 이탈한 뒤, 보호시설이나 그룹 홈에서 생활하며 갈등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게 영화화되는 중이다. 그만큼 독립영화 주요 창작 층인 청년세대에겐 해당 사안이 결코 드물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빅슬립>은 그런 경향 안에서 어떤 변주를 펼치고 어떻게 차별화되는 단면을 선보일 수 있는가가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할 테다.
 
영화 속 가출청소년 묘사는 크게 이채롭지는 않다. 관련 소재를 다루는 영화 속 풍경은 지극히 황량하고 차갑게 마련이다. 주인공인 가출청소년들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대도시를 누비지만 그 넓은 도시공간 안에서 그들이 마음 편하게 몸을 뉠 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끊이지 않고 도시의 번화가를 쏘다니지만 하늘을 날던 새가 둥지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가출청소년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없다. 사회적 기준으로 이들에게는 1차로 가족이 기다리는 '집', 2차적으로는 약간의 청소년쉼터나 보호시설이 고려될 뿐이다.
 
하지만 집에서 못 견뎌 나온 이들에게 공공기관인 쉼터가 필연적으로 띄게 되는 통제와 함께 가족에게로의 연결은 내킬 리 없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들이 그 공적 안전망을 벗어나는 순간 세상은 급속도로 무정해진다. 숙박시설도 PC방도 심야에는 이들을 받아주지 않기에 결국 도시의 구석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폐가나 빈집을 전전하는 풍경 묘사는 극한상황 강조가 아니라 리얼리티인 것이다. <빅슬립>의 가출 팸 역시 그런 전형을 드러낸다.
 
서로에게 과거이자 미래의 거울을 보게 된 두 주인공
 
영화는 가출 팸 내부의 극심한 폭력과 위기에 내몰린 구성원들이 겪는 불행을 왜곡된 스펙터클 형태로 선정적으로 소비하려거나, 혹은 계몽적으로 가족과의 화해 방식으로 다루려고도 하지 않는다. 대신에 일종의 대안적 가족형태 복원이라는 주제를 몇 가지 경우의 수로 관객이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여기에서 장편영화의 호흡을 온전히 갖추고 있음에도 확정형의 결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열린 결말에 가까운 마무리를 통해 관객 각자의 고민 방향에 따라 각각의 확장 스토리를 가능케 하는 구성을 취한다.
 
다만 정상가족의 복원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선을 긋는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객이 못내 기원할 대안가족 완성의 단초도 뚜렷하게 제시하진 않는다. 기영과 길호의 관계에서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이 영화는 자칫 밋밋하게 보이거나 그래서 어쩌라고? 로 치닫기 쉬운 설정 상 함정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관습적인 묘사와 결말을 피하면서 상대적으로 남들 도전하지 않는 구불구불 희미한 오솔길을 등정하려는 도전 격이다.
 
기영의 과거는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는다. 공장에서 쉬는 시간에 형님처럼 대하는 반장의 질문에도 제법 거칠게 살았다는 정도로만 흘려보낼 뿐이다. 제조업 생산직 공장에서 상대적으로 연차도 쌓이고 선배 대접 받는 레벨의 '한국남자'들이라면 허풍과 치기를 섞어 미화하게 마련인 과거를 기영은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은 눈치다. 담배는 끊임없이 피워대지만 술을 그렇게 즐기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과묵하게 일만 할 뿐이다. 딱히 미래에 대한 포부나 계획도 있어 뵈지 않는다. 반장이 높으신 분에게 기영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뭘 해보고 싶으냐는 질문에도 그저 여기에서 지금처럼 오래오래 일하고 싶다는 답으로 일관할 따름이다. 딱히 교류하는 친구나 친지도 없다.
 
길호는 기영에게 가출 이유를 설명하고 훗날 기영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는 것처럼 (엄마가 죽고 나서) 의붓자식에 대한 정이라곤 전혀 없는 새 아빠에게 가정폭력으로 시달리는 집에서 숨 쉴 수 없다. 그런 속사정을 토로하는 길호에게 기영은 새 아빠가 길호를 폭행하는 심리를 꿰뚫어보듯 설명한다. 생판 남이 멋대로 자기 상황을 재단하는데도 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이 과정 묘사를 통해 기영이 길호에게서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보고 있음을 관객은 깨닫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낯설고 위험을 감수해야 할 가출청소년 돌봄을 감행할 이유가 이 험한 세상에서 없지 않는가.
 
영화 안/밖의 명백한 제도적 한계와 다양한 구도의 앙상블
 
"빅슬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빅슬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하지만 영화 속 현실은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쉽게 풀어낼 수 있게 내버려둘 리 없다. 기영은 공장에서 그의 역할을 기대하지만 전혀 내키지 않는 작업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단호하게 거부하기도 그렇고 아무 생각 없이 수행하기도 개운하지 못한 고충 때문에 점점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런 사정 때문에 자신에게 조금씩 호감을 보이기 시작한 공장직원 '초은'에게도 짜증을 부리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길호가 저지른 실수가 둘 사이를 어그러뜨린다.
 
결국 둘의 며칠간 동거는 파국을 맞이한다. 짧은 시간에 못 볼 꼴 다 보게 되었지만 머리를 좀 식히고 나니 기영은 길호의 행방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관객이 짐작하듯 기영은 길호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았기에 길호가 자신처럼 방황하는 게 못내 안쓰러운 것이다. 그래서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길호를 찾아 나선다. 기영 혼자 가출 팸 청소년들과 맞닥뜨리는 상황을 보면서 아마 비슷한 유형의 영화를 경험한 이들이라면 그 장면에서 우발적 비극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가슴 졸일 테다. 하지만 감독은 그렇게 편리하고 관습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생각은 없다.
 
영화의 제목 <빅슬립>은 (현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거장이자 탐정 캐릭터인 '필립 말로우'를 창조한) 레이먼드 챈들러의 고전에서 따 왔다. 하지만 제목과 연결되는 두 주인공의 '빅슬립'은 원작의 차가운 세계관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인다. 개별 관객은 영화가 끝난 후 극중 인물들이 가게 될 미래의 삶을 상상하며 몇몇 모델을 설정할 테다. (1) 기영+길호 (2) 기영+길호+초은 (3) 기영+길호(+초은), (4) 기영+초은(+길호) 등의 모델이 상상으로 그려질 테다. 누군가는 길호의 친구이자 가출 팸의 우두머리 격인 '영범'까지 함께 품는 그림을 희구하겠지만 그건 너무 나간 것 같다.
 
영화 밖 현실에서 기영과 길호의 조합은 아쉽지만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 실제로 둘의 관계가 지속된다면 법제도에 의해 기영은 처벌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국의 관련 제도는 원수 같은 사이라 할지라도 그런 실상이 공식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부모의 친권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기영이 길호를 아무리 선의로 떠맡는다 해도 공권력이 그의 선의를 인정해줄 수 없다. 그들에게 최대치는 의붓자식 떠맡았다고 성질을 부리는 길호의 새 아빠가 사실상 방관하는 허용범위 내일 테다.
 
게다가 기영과 길호의 관계에 명백히 하위로 묘사되는 초은(길호의 존재도 영화 끝날 때까지 알지 못하는)까지 함께 어우러지는 건 그저 해피엔딩 강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영은 길호를 자신의 과거로 투영하고 있기에 초은의 위상을 더 상위로 두기도 쉽잖아 보인다(초은의 기영을 향한 호감은 그렇게 부차적인 데 그치고 말 것으로 보인다). 초은 역시 자신의 과거 정서적 상처를 기영과의 관계 속에서 조금씩 극복하는 능동형 캐릭터이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 속 인물 구도에선 길호의 위치를 돌파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한다. 그 비운의 원인은 다음부터 논하려 한다.
 
억지 해피엔딩 대신 우리 곁 그들에게 관심을 주문하는 영화
 
"빅슬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빅슬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빅슬립>은 자칫 상투적 묘사의 답습으로 치닫기 좋은 가출청소년 소재 한국독립영화에서 결말의 색다른 변주는 물론 사회적 변화 양상의 단면을 제시하는 작업으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고자 한다. 독립영화계에서 여성 감독 + 여성 서사가 경향으로 떠오르면서 오히려 드물어진 남성 버디 무비로의 접근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전통적 가족 유형으로의 복고와는 차별화가 뚜렷한 결과물이다.
 
기영과 길호의 관계가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상징적 계기가 있다. 둘이 강변으로 산책을 나간 자리에서 서로를 결혼 '못한' 남자와 결혼 '못할' 남자라고 자조하며 웃어대는 동병상련의 찰나다. 이 짧은 장면 묘사를 통해 그들이 각각의 인생에 대해 큰 희망이나 기대와는 담을 쌓고 있으며 노력해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란 정서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각인된다. 두 남자의 상호 동기화는 그들이 전통적인 가부장제 하 남성의 위상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포기했으며, 또한 그렇다고 더 이상 과거에 비해 추락한 가정 내 권위나 사회적 지위 때문에 풀 길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것으로 상정되는 남성 집단과도 다른 정체성으로 표상된다. 그렇게 새로운 유형 남성들의 대두를 공식화하는 주목할 만한 접근법이다.
 
그런 흥미로운 개념화가 영화 속에서 형상화되는 반면, 주요 인물들의 개별 사정은 속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는다. 현실의 변화는 개인들에겐 더디게 반영되기 때문에 그런 시류가 그들 각자에게 도달하는 데에는 상당한 격차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회적 변화양상을 간파한 감독은 판타지로 도피할 생각은 전혀 없기에 당연히 취했을 법한 영화적 결말이다. 대신에 법제도와 사회인식 변화를 기다리거나 혹은 요구하는 틈바구니의 사각지대를 겨냥한다. 전반적인 변화를 앉아서 대기하지만 말고 개인이 각자 할 수 있는 생각과 시도에 주목하자는 제안이다. 영화 내내 그렇게 감독이 던지고픈 소박한 메시지를 아로새기는데 집중한다.
 
그런 이해심과 배려 가운데 두 주인공의 운명은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잔상은 확실하게 관객에게 각인된다. 두 발 쭉 뻗고 포근하게 숙면을 취하는 것까지는 아닐지언정, 상호 일정 교감에 우여곡절을 거쳐 도달한 (과거와 현재의) 둘이 미래를 위한 충전과 어제의 휴식을 겸해 깊은 잠에 빠진 상태가 바로 그 이미지다. 제발 영화가 챈들러의 원작에서 제목만 따온 것이기를 대부분의 관객이 소망하게 만들 법한 그림이다.
 
<작품정보>
 
빅슬립 Big Sleep
2022|한국|드라마
2023.11.22. 개봉|113분|15세 관람가
감독 김태훈
주연 김영성(기영 역), 최준우(길호 역)
출연 이랑서(초은 역), 김한울(영범 역), 현우석(오현 역), 김자영(새엄마 역)
제작 CINEBUS
배급 찬란
 
2022 27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김영성),
한국영화감독조합 메가박스상, 오로라미디어상
빅슬립 김태훈감독 김영성 최준우 이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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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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